중국공산당뉴스
제1세대 지도핵심- 모택동
2006년 12월 11일 09:11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모택동(1893-1976)은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며 무산계급 혁명가, 전략가와 리론가이며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창시자와 지도자이다. 1893년 12월 26일, 그는 호남성 상담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신해혁명이 폭발한 뒤 봉기를 일으킨 신군에서 반년동안 복무했다. 1914년-1918년, 호남제1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전야 채화삼 등과 함께 혁명단체인 신민학회를 조직했다. 《5•4》운동 전후 맑스주의를 접촉하여 받아들였으며 1920년에 호남에서 공산주의조직을 창설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제1차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고 그뒤 중공상구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장사, 안원 등지의 로동자운동을 령도했다. 1923년에 중공 제3차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중앙령도사업에 참가했다. 1924년 국공합작을 실현한 뒤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와 제2차전국대표대회에서 모두 후보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광주에서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 직무를 대행하면서 《정치주간신문》의 주필을 맡았으며 제6회 농민운동강습소를 주관하였다. 1926년 11월, 중공중앙 농민운동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25년 겨울부터 1927년 봄까지 선후로 《중국사회 각 계급의 분석》, 《호남농민운동시찰보고》 등 저작을 발표하여 중국혁명에서 농민문제의 중요한 지위와 무산계급이 농민투쟁을 령도하는 극도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진독수의 우경사상을 비판했다.

국공합작이 전면적으로 파렬된 뒤 1927년 8월에 소집된 중공중앙 긴급회의에서 모택동은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 즉 혁명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기했으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호남, 강서 변계에 가 추수기의를 령도하고 뒤이어 기의부대를 거느리고 정강산에 올라가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첫 농촌혁명근거지를 창설했다. 1928년 주덕이 령도하는 기의부대와 상봉하여 로농혁명군(얼마 안되여 홍군으로 개칭) 제4군단을 창설하고 그가 당대표, 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주덕이 군단장 직무를 맡았다. 그를 주요 대표로 하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국민당정권의 통치가 비교적 박약한 농촌에서 무장투쟁을 발전시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나중에 도시와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는 길을 개척했다. 그는 《중국의 홍색정권은 어째서 존재할수 있는가?》, 《한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 등 저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리론적으로 천명했다. 1930년 5월, 《서책주의를 반대하자》는 글을 써 《조사가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는 저명한 론단을 제기했다. 같은 해 8월, 홍군 제1방면군이 창설된 뒤 그가 총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1931년,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정부가 강서 서금에서 창립되였고 그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33년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보충선거되였다. 1930년말부터 주덕과 함께 홍군 제1방면군을 령도하여 국민당군대의 여러차례 《포위토벌》을 물리쳤다. 왕명을 대표로 하는 《좌》경로선 지도그룹이 중앙혁명근거지에 들어온 뒤 모택동을 당과 홍군의 령도직위에서 배척하고 부동한 전략과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제5차 반《포위토벌》전쟁의 실패를 빚어냈다. 1934년 10월, 홍군 제1방면군의 장정에 참가했다. 장정도중 1935년 1월에 중공중앙정치국은 귀주에서 확대회의(즉 준의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령도기구를 확립했다. 10월, 중공중앙과 홍군 제1방면군은 섬북에 도착하여 장정을 끝냈다. 12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란 보고를 진술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천명했다. 1936년 10월, 홍군 제4방면군과 제2방면군은 장정을 거쳐 감숙경내에 도착하여 선후로 홍군 제1방면군과 상봉했다. 같은 해 12월, 주은래 등과 함께 서안사변의 평화적해결을 추진함으로써 내전으로부터 제2차국공합작, 공동항일에로 시국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관건으로 되게 했다. 1936년 12월,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를 쓰고 1937년 여름에 《실천론》과 《모순론》을 썼다.

항일전쟁이 시작된 뒤 모택동을 비롯한 중공중앙은 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원칙을 견지하고 대중을 힘써 발동하고 적후유격전쟁을 전개하면서 수량과 규모가 큰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이러한 항일근거지는 대부분 화북산간지대에 세워졌으나 일부는 화북평원과 소북평원에도 분포되였다. 1938년 10월, 중공 제6기 6차전체확대회의에서 《맑스주의의 중국화》지도원칙을 제기했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지구전에 대하여》, 《〈공산당인〉발간사》, 《신민주주의론》 등 중요 저작을 발표했다. 1942년, 전당을 령도하여 정풍운동을 전개하고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시정함으로써 전당으로 하여금 맑스-레닌주의의 보편적진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실천을 서로 결부시키는 기본방향을 장악하게 하고 항일전쟁과 전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사상적토대를 닦아놓았다. 1943년, 근거지군민들을 이끌고 생산운동을 전개하여 심각한 경제곤난을 이겨냈다. 같은 해 3월, 중공중앙정치국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45년, 중공 제7차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사회하였으며 《련합정부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진술했다. 대회는 《대담하게 대중을 발동하고 인민력량을 장대시키며 우리 당의 령도하에 일본침략자를 타승하고 전국인민을 해방시키며 신민주주의 중국을 창건한다》는 전략을 제정했다. 모택동사상이 이번 대회에서 중공의 지도사상으로 확정되였다. 그는 제7기 1차전체회의부터 1976년 서거할 때까지 줄곧 중공중앙 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 장개석이 공산당과 그 무장력량을 소멸하려고 시도하는 현실에 대비해 그는 《날카롭게 맞서는》 투쟁방침을 제기했다. 1945년 8월, 그는 중경에 가 장개석과 담판을 가지고 국내평화를 쟁취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념원을 표명했다.

1946년 여름, 장개석이 전면적내전을 발동한 뒤 모택동은 주덕, 주은래와 함께 중국인민해방군을 령도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우세병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각개 섬멸하였다. 1947년 3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주은래, 임필시와 함께 섬북에서 전전하면서 서북전장과 전국의 해방전쟁을 지휘했다. 1947년 여름, 중국인민해방군은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으로 넘어갔으며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의 령도하에 료심, 회해, 평진 3대 전역과 1949년 4월 장강을 뛰여넘은 뒤의 작전을 거쳐 국민당정부를 뒤엎었다. 1949년 3월, 중공 제7기 2차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중요한 보고를 진술하여 당의 사업중점을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 전이시키기로 결정하고 전국적승리를 거둔 뒤의 당의 제반 기본정책을 규정했으며 전당에 반드시 겸손하고 근신하며 교만하지 않고 성급하지 않는 작풍을 확보하고 반드시 간고분투하는 작풍을 계속 확보할것을 호소했다. 7월 1일, 《인민민주주의독재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인민공화국의 정권 성격과 대내, 대외 기본정책을 규정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그가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50년 6월, 중공 제7기 3차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하여 국가재정경제상황의 기본적호전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데 대한 총적과업을 제기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군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하고 중국동북부를 위협하는 형세의 핍박에 의해 그를 비롯한 중공중앙은 항미원조전쟁 결단을 내렸다. 1950년-1952년, 그의 령도밑에 토지개혁, 반혁명진압과 기타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탐오를 반대하고 랑비를 반대하며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삼반》운동과 회뢰를 반대하고 탈세루세를 반대하며 국가재산절취를 반대하고 원재료와 노력을 규정보다 적게 들이는것을 반대하며 경제정보절취를 반대하는 《오반》운동을 전개했다. 1953년, 그의 제안에 따라 중공중앙은 과도시기 당의 총로선을 선포하여 체계적으로 사회주의공업화와 생산자료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1954년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그의 주관으로 작성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하고 그가 이번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임기가 1959년까지였다. 1956년 4월, 《10대 관계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발표, 이 연설은 중국국정에 알맞는 사회주의건설의 길에 대하여 일부 초보적인 탐색을 시도했다. 뒤이어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제기했다. 1956년, 생산자료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개조가 기본상 완수되였다. 같은 해 9월, 중공은 제8차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전국인민들의 주요과업은 이미 력량을 집중하여 사회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로 전변되였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방침은 후날에 충실히 집행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뒤 지도사업에서 일련의 착오와 좌절을 빚어냈던것이다. 1957년 2월, 그는 《인민내부모순을 정확히 처리할데 관하여》라는 연설에서 사회주의사회에서 적아간과 인민내부 두가지 부동한 성격의 모순을 정확히 구분하고 처리할데 대한 학설을 제기했다.

같은 해 7월, 《중앙집권제도 있고 민주주의도 있으며 규률도 있고 자유도 있으며 통일적의지도 있고 개개인 마음의 상쾌와 생동활발도 있는 그러한 정치적국면을 조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1958년 《대약진》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발동했다. 1959년, 려산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하였다. 그는 워낙 자기가 이미 발견한 착오들을 시정할 생각이였으나 회의후반에 팽덕회에 대한 비판을 잘못 발동했으며 회의가 끝난 뒤 전당적으로 《반우파》투쟁을 잘못 전개했다. 1960년 겨울부터 1965년까지 그를 비롯한 중공중앙의 령도밑에 국민경제에 대한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실시하여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에서의 착오를 초보적으로 시정함으로써 국민경제로 하여금 비교적 신속히 복구되고 발전하게 했다. 이 기간 그는 일련의 조치를 강구하여 농촌사업과 기타 분야에서의 《좌》적 착오를 초보적으로 시정했다. 하지만 1962년 9월에 소집된 중공 제8기 10차전체회의에서 그는 사회주의사회의 일정한 범위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확대화, 절대화했으며 그가 1957년 반우파투쟁후 제기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간의 모순은 여전히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이라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1963년-1965년, 농촌과 도시 사회주의교양운동을 발동하여 운동의 중점은 이른바 《당내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투쟁하는것이라고 제기했다. 5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중국공산당을 령도하여 쏘련공산당 지도자가 실시하는 대국주의와 중국을 간섭, 통제하려는 시도와 단호한 투쟁을 벌렸다.

1966년, 국내 계급투쟁형세에 대한 극단적인 추측으로 말미암아 그는 《문화대혁명》운동을 발동하였는데 이 운동은 림표, 강청 두 반혁명집단의 조종하에 특별히 란폭하게 발전하여 그의 예상과 통제를 훨씬 벗어났으며 10년동안이나 지속되여 중국의 많은 분야에 심각한 파괴와 손실을 빚어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모택동은 일부 구체적인 착오들을 제지하고 시정하기도 했다. 그는 림표반혁명집단을 분쇄하는 투쟁을 령도하고 강청, 장춘교 등의 최고령도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대외정책에서 그는 《3개 세계》획분 전략과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부리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상을 제기했고 대외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현대화건설을 위해 유리한 국제적조건을 마련해놓았다.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서거했다.

모택동은 만년에 엄중한 착오를 범했으나 그의 일생으로부터 볼 때 중국혁명에 대한 쟁론할 여지가 없는 공적은 과실에 비해 훨씬 크며 그는 공적이 첫째이고 착오가 둘째이며 여전히 중국인민의 숭배와 존경을 받고있다. 중국공산당은 그가 서거하여 5년이 지난 뒤 그의 전부 혁명활동과 혁명사상에 대해 중앙위원회결의형식으로 전면적인 평가를 내렸다. 모택동사상은 중국에서 맑스주의의 발전으로서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으로 된다. 그의 주요 저작은 《모택동선집》(전 4권), 《모택동문집》(전 8권)에 수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사백과전서(1949-1999)》에서 발취, 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 1999년 7월 출판)

  래원: 인민넷-중국공산당뉴스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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