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 기획보도(35)
공화국과 더불어 성장해온 참된 의학자의 얼
-연변대학 의학부 교수 의학박사 윤종주와의 인터뷰
박정웅
2009년 10월 15일 16:35【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윤종주 략력:
1935년 1월 25일 연길현 조양천 출생
1957년 연변대학 의학부 졸업
1982년 일본 히로사끼대학 의학박사학위 취득
1983년 전국소수민족지구, 변경지구 우수과학기술일군
1984년 길림성 첫패 돌출한 공헌이 있는 중청년전문기술인재
1992년 국무원 정부특별수당금 획득자
1994년 전국변경지구우수의학과학기술일군
1983-1999년 연변의학원 생화학교연실 주임 겸 종양생물화학 연구실 주임
1984-1986년 연변의학원 기초의학부 주임(겸)
1995-1998년 연변대학 의학원 기초의학연구소 소장
1997-2001년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리사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제8, 9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창문으로 가을해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포근한 거실에서 윤종주교수와 마주앉았다. 먼저 요즈음 항간의 화제로 된 국경열병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국경열병식을 격동된 심정으로 거듭 보았습니다. 공화국과 더불어 성장해온 한 의학자로서 공화국이 탄생하여서부터 올해의 60주년 경축대회까지 죽 보아왔습니다. 이번 열병식을 보면서 우리 나라가 진정 세계의 강국으로 일떠섰구나 하는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윤종주교수는 이렇게 자신의 감개무량함을 설파한다.
어머니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1935년 1월 25일, 윤종주(尹宗柱)는 길림성 룡정현 조양촌진에서 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났다. 한때 왕청에 옮겨가 살다가 토비란(亂)으로 윤종주네가 이사간 곳이 바로 연길현 이란구에서 한 20리 남짓이 떨어져있는 왕우구(王愚溝)라는 골안이였다. 1946년, 해방된 이듬해에 아버지는 페결핵으로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종주네 4남매를 키우는 중임이 어머니의 갸날픈 어깨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학교까지 가자면 수풀이 우거진 산길을 10리, 그리고 왕청에서 이란으로 가는 큰 길을 또 10리 걸어야 했다. 그러나 윤종주는 이런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20리 길을 걸어 꼭꼭 학교로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뼈빠지게 일해 절 공부시키고있었는데 어머니께 보답하는 길이 저로서는 공부를 잘하는것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에 기어코 공부를 잘하려고 했던것입니다.” 윤종주교수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1950년 3월, 윤종주는 끝내 연변고급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고중시절부터 종주는 조학금을 받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돈까지 대주면서 공부시키는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어떡하나 공부를 잘해 나라에 보답하리라.) 윤종주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자기는 학생인것만큼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나라에 보답하는 길이 공부를 잘하는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때는 항미원조시기였으므로 등화관제(燈火管制)가 심하였다. 때문에 종주는 무더운 여름철에도 밤에 창문을 닫아걸고 두꺼운 카텐까지 쳐놓고 장밤 공부를 하였다.
바로 그 시절에 종주는 오스뜨롭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를 탐독하였으며 그자신의 일생에 영향을 준 오스뜨롭스끼의 명언을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였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것은 삶이다. 삶은 인간에게 있어서 한번밖에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없이 산 지난날 때문에 뼈저린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비굴하고 너절한 지난날때문에 치욕을 맛보지 않도록, 그리고 죽으면서도 일생의 모든 힘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인 인류해방을 위한 투쟁에 바쳤다고 긍지높이 말할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그때 그는 마음속으로 이것을 되뇌일 때마다 청춘의 뜨거운 피가 막 끓어번지는 느낌을 받군 했다.
대학입학시험이 박두해오고있었다.
(앞으로 뭘 할것인가.) 윤종주는 이 엄숙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였다.
문득 그는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던 연변대학 의학부의 로기순(盧基舜)박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로박사는 연변에서 가장 학문이 있는 학자로 정평이 나있었다.
(로박사께서 계시는 의학부를 지망하자. 그분의 학생으로 되여 앞으로 나도 출중한 의학자가 되자.)
그리하여 윤종주는 1952년 9월, 항미원조승리를 경축하는 환호소리와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대학 2학년때 윤종주는 입당하였으며 그후 의학부의 제1임 학생당지부 서기로 활약하기도 했다. 졸업시에는 우수졸업생으로 뽑혔으며 졸업생대표로 졸업식에서 발언하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모교에 남아 생화학강좌 교원으로 되였다. 그는 과학에 대한 탐구심으로 불타고있었다. 그의 앞에는 바야흐로 희로애락으로 반죽된 과학의 가시밭길이 펼쳐지고있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참된 의학자의 얼을 지켜1958년 10월, 윤종주는 북경의과대학 생화학강좌로 연수하러 갔다. 거기서 그는 중국생화학분야의 창시자의 한사람인 중국과학원 원사 류사직(劉思職)교수와 영양생화학자 장창영(張昌潁)교수 및 효소학전문가 정연개(丁延衸)교수 등 명망있는 학자들의 지도밑에 생화학리론, 과학연구방법과 교학법을 계통적으로 배워 그후의 교학과 과학연구를 위해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1959년 11월, 북경의과대학에서 연수하고 돌아온 윤종주는 선후로 려지전기영동장치(纸上电泳槽) 한천전기영동장치(琼脂电泳槽)의 연구제작에 달라붙었다. 그후 자체의 힘으로 재료를 모아 만든 전기영동장치로 분리한 전산탈수소효소의 아이소자임(isozyme, 同工酶)그라프가 어찌나 잘 나왔던지 그후 전국 각지로부터 이 기술을 배우려고 문의하는 편지가 눈송이처럼 날아들기까지 하였다.
50년대말부터 연변의 부분적 지구에 지방병이 만연되기 시작했다. 고향의 인민들이 극산병(克山病), 대골절병(大骨節病), 지방성갑상선종 등 지방병으로 고통에 모대기는 것을 본 윤종주는 가슴이 몹시 쓰라렸다. 그리하여 60년대에 윤종주는 지방병연구소조의 일원으로 동료들과 함께 심전도(心電圖)기를 메고 청진기를 건채 연변의 산간지대를 편답하면서 이런 지방병 원인의 보편조사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어떤 때는 명절도 집에서 못쇠고 연구소조의 다른 성원들과 함께 산간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정황을 료해했으며 연변지구 지방병의 발병력사와 류행병학의 법칙을 조사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윤종주는 지방병연구소조의 성원들과 함께 선후하여 “연변지구극산병류행병학조사보고” 등 7편의 론문을 써냄으로써 연변지구 극산병예방치료사업에 기초를 닦아놓았다.
“10년내란”으로 하여 모든 시비가 뒤바뀌여지고 모든 사업이 거의 정체상태에 처해있던 상황에서도 윤종주는 의학연구사업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는 신념만은 꺽지 않았다. 드디여 그는 분자학적차원에서 지방병과 연변지구의 일부 직업병 및 흔한 병과 다발성질병의 본질을 탐색하기 위하여 1971년부터 “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의 림상의의에 관한 연구”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반복적인 실험끝에 윤종주는 마침내 한천전기영동법으로 혈청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을 분리해냈고 유르꼬프씨의 방법을 개량하여 직접 비색정량법으로 우리 나라 정상인과 여러가지 질병환자의 혈청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을 측정해냈다. 그후 그는 선후로 우리 나라 건강한 성인의 혈청젖산탈수소 아이소자임그라프 및 그 정상치에 대한 탐구와 TNT중독, 간장질환, 극산병, 류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청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그라프 및 그 림상의의에 관한 연구에서 성과를 따내였다.
그는 선후로 중국생리과학회 제15기 전국학술회의와 제3차 중국생화학회의에서 상술한 연구 론문을 발표하여 국내생화학계의 중시와 호평을 받았다. 이 두차례 회의에서 윤종주는 그 성과가 중국생화학계의 인정을 받아 제15기 중국생리과학회 리사, 중국생화학회, 제1기리사회 리사로 당선되였으며 “국외의학분자생물학분책”의 편집으로 특별초청받았다. 그의 “젖산탈수소효소 아이소자임의 림상의의에 관한 연구”는 길림성 1979년과학기술성과상을 안아왔다.
이국땅에서 깨달은 조국의 의미1978년부터 중국에서는 문호를 개방하여 처음으로 18개 나라에 류학생을 파견하였다. 윤종주는 “사람의 일생에서 흔치 않은” 이 기회를 잡았다.
윤종주가 류학간 곳은 일본 히로사끼대학 의학부 제2생화학강좌였으며 지도교사는 사도 기요미(佐藤清美)교수였다. 윤종주는 중일량국이 국교를 회복한 이래 처음으로 히로사끼대학으로 류학간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였다. 1980년 2월 29일, 그가 히로사끼의학부에 도착했을 때 제2생화강좌에서는 중일량국 국기를 꽂아놓고 그를 환영하였다. 이튿날, 히로사끼대학의 의학부장과 학장도 각기 두 나라 국기를 꽂아놓고 정중히 그를 접견하였다.
이 사실이 그에게 준 충격은 너무나 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여기로 온 첫 학자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하고있다. 그들의 나에 대한 평가가 곧 중화인민공화국학자에 대한 평가로 된다. 나라에서 날 첫패로 류학보내주었는데 어떡하나 꼭 성적을 따내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그는 무거운 사명감으로 가슴이 뻐근해났다.
일을 시작해놓고보니 곤난이 막심하였다. 누구도 해보지 못한 과제여서 모든것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했다. 2년간의 악전고투를 거쳐 윤종주는 “큰쥐간암발생과정에서 유도되는 UDP-그루크로닐트란스페라제의 정제와 그 성질에 대하여”란 박사학위론문에서 간암발생과정에서 해독계통효소의 일종인 UDP-그루크로닐트란스페라제가 배태형변이를 발생하고있다는것을 천명했고 이 효소를 분리해내고 정제했으며 그 성질을 규명하고 림상적의의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출함으로써 종양효소학분야에서 한가지 공백을 메운것으로 하여 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사도교수는 리별에 즈음하여 윤종주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남기였다.
“북경이나 도꾜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모여있어 하루에도 몇번이고 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연길과 히로사끼에도 때로 반짝이는 별이 확실히 있다는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끔 연구를 하기 위하여 중국과 일본의 한 귀퉁이에서 함께 노력합시다.” 윤종주박사는 지금도 늘 사도 기요미교수의 이 의미심장한 말로 자신을 격려하군 한다.
장백산자원 연구개발로 민족경제진흥에 기여하고저귀국한 이듬해에 윤종주는 교수로 파격승진하였다.
당시 연변대학 의학부에는 정규찬교수를 포함하여 7명의 교수밖에 없었으며 그가 귀국하기전까지 의학부력사상 박사학위를 가졌던 사람은 건국전 박사학위를 딴 로기순박사 한분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류학생제도가 회복된후 윤종주를 포함하여 처음으로 3명의 박사가 탄생했던것이다.
“오늘에 와서 의학부에는 박사가 도합 87명이 있고 정, 부 교수 99명. 연변대학 부속병원에는 박사68명, 정, 부 교수급 주임의사, 부주임의사 등 297명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건국 60년래, 그리고 연변대학 개교 60년래 의학부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개혁개방 30년의 변화가 돌출했던것입니다. 당과 조국의 혜택으로 대학을 나오고 외국류학도 할수 있었던 저는 당시 전부의 여생을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해서 이바지하겠다는 결심을 내렸었습니다.”
귀국해서부터 윤종주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UDP-GT, -GT와 GST- 등 종양표식(標志)효소가 소화계통종양 및 그 암전병리변화조직중에서의 발현 및 그 림상의의에 대한 계렬연구를 벌여나갔다. 그중 “새로운 간암표식효소 및 그 성질에 대한 연구”가 1987년도 국가교육위원회 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수상했으며 종양표식효소에 대한 계렬연구는 1991년 길림성고등학교과학기술진보개인상을 탔다. 윤종주가 책임졌던 위생부중점과학기금항목 “새로운 종양표식효소-태반형GST가 소화계통종양에서의 발현 및 그 림상의의에 대한 연구”는 1994년 길림성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수상했다.
1995년 8월하순, 윤종주는 연변대학 의학원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공동연구과제인 “초종용의 화학성분 분리와 동정 및 그의 약리활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하여 이순(耳順)의 나이에 한국으로 초청받아갔다.
7개월간의 긴장한 연구를 거쳐 윤종주는 “불로초”라고 불리는 초종용에서 네가지 화합물을 분리, 정제해내고 그 구조를 밝혀냈는데 그중 3가지는 새로 발견한것이다. 그는 또 동물실험을 통해 초종용의 항암, 항염증, 항산화, 항피로, 항로쇠 작용을 확인함으로써 초종용을 항암약, 항염증제와 건강식품으로 개발할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초종용의 생물활성물질의 화학구조와 항암,항염증 작용에 관한 연구”는 2002년 길림성과학기술진보 2등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연구한 “장백산 진주매(珍珠梅)의 화학성분과 약리작용에 관한 연구”는 2005년 길림성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 윤종주교수는 국내외학술지와 국내외학술회의에서 론문 200여편을 발표했으며 전문저서와 번역서 5권을 출판하였다. 그의 뛰여난 연구성과는 국내외생화학학계와 국가해당부문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 백두산에는 천연식물, 미생물, 곤충 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이런 자원에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있는 항암물질이 많이 들어있지요. 우리는 이런 자원개발을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진전이 매우 굼떴습니다. 초종용연구를 계기로 항암활성물질개발에 진력하고 또 이면의 성과로 의약품, 건강식품을 개발해내여 연변의 경제건설과 진흥을 위해 한몫 하고싶었던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윤종주교수는 젊은 조선족의학자들이 계속 이면의 연구를 이어나가기를 진심으로 희망하였다.
스승 로기순박사의 잃어진 박사학위론문을 찾아내기 위하여“10년 동란으로 하여 로기순교수님의 박사학위론문은 물론 그외의 그 어떤 가치있는 학술자료가 적혀있는 종이쪼각 한장도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로기순교수님은 우리 연변대학 의학부의 초대 학부장 겸 제1대 생화학 교수님이였습니다. 일본류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온 저는 그후 연변의학원 기초의학부 학부장 겸 생화학강좌의 제2대 주임교수직을 맡았습니다. 저는 로기순교수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그의 생화학사업의 계승자로서 잃어버린 스승님의 박사학위론문은 반드시 찾아내야 할 우리 학교와 생화학강좌의 력사적유산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하여 윤종주는 1920년대 후반기로부터 1930년대 상반기 사이에 출판된 미국 《화학문적》(CA), 일본 《의학중앙잡지》 및 《일본생화학회회보》 등 국제문헌들을 계통적으로 찾아 열독하는 가운데서 로기순교수님이 1929년 7월부터 1932년 1월 일본 규슈대학 의학부 의화학강좌에 류학하는 기간 완성한 박사학위론문과 연구업적을 찾아냈다.
“로기순교수님은 1932년1월 일본 규슈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는데 박사학위론문은 ‘뇨산 및 알란토인 분해효소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서 주론문 3편 과 참고론문 1편, 도합 4편으로 이루어졌던것이다. 로기순박사는 당시 림상의학상에서 종종 볼수 있는 통풍(痛风, 즉 체내에서 푸린대사산물인 뇨산의 축적 혹은 푸린대사장애로 하여 일어나는 질병)을 해결할 목적으로 뇨산의 분해대사, 특히는 뇨산분해효소에 대하여 창조적탐구를 하여 비교생화학연구분야에서 귀중한 과학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후세에 보귀한 과학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그의 연구성과는 후일 그의 지도교수였던 고다마 게이조우(児玉桂三) 등의 저서 《의화학》(医化学,金原出版社,1951), 가끼우찌 사무로우(柿内三郎) 등이 편찬한 《현대의학대사전》 제5권 생화학편(春秋出版社,1931) 및 롱그(Long) 주필 《생화학자수책》(영국 런던,1961) 등에 인용되였는바 뇨산분해대사의 연구와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로기순교수님은 지난세기 20년대말부터 생화학연구사업에 종사하여온 우리 나라 로일대의 저명한 생화학자입니다. 그는 학식이 연박하고 학문을 엄격히 하는 학자이며 학생들에게 엄격히 요구하는 의학교육자였습니다. 또한 의술이 고명하고 의덕이 고상하여 연변인민의 애대를 받아온 의학자였습니다. 그는 조국과 인민을 사랑하고 필생의 정력을 의학교육사업과 의료위생사업에 이바지하여온 우리민족 고등의학교육의 창시자이며 선구자입니다.”
조선족과학기술자 조직과 교류 활동에 적극 동참윤종주교수는 연변과학기술협회 부주석,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 회장 등 직무를 력임했었다.
“올해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여 우리는 8월에 성대한 경축모임을 가졌고 저또한 전직 회장의 신분으로 협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되는 책에 축사를 썼습니다. 20년래 우리 협회는 없던데로부터 창립되고 창립되여서부터 오늘날까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혁개방과 더불어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제가 회장을 담임하는 기간에 우리 협회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어찌보면 협회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관건적시기라고 할수 있었습니다,”
1998년 그가 협회 리사장을 맡은 이듬해에 국무원에서는 새로운 사회단체조례를 공포했는데 모든 협회는 반드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재등록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단일민족협회인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는 재심사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되였다. 윤종주는 수차 중국과학기술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및 국가민정부의 주요 책임자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발달하지 못한 변경소수민족지구로서 민족의 경제진흥과 문화과학기술의 번영을 위해서는 전국 각지에 있는 우수한 조선족과학기술인재들의 재능을 발휘해 민족지구의 경제를 춰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의 주요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피력했다. 그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는 중국과학기술협회 관장으로부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관장으로 넘어갔으며 2000년 12월 국가민정부에서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에 법인사회단체 등록증명서를 발급했다. 이로써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는 국가급협회로 정정당당하게 활동을 할수 있는 법적기초를 다지게 되였던것이다.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는 설립초기 명칭이 중국조선족과학가협회였으며 부교수급 이상의 학자만이 회원자격을 가질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협회는 결국 60세 이상의 회원이 다반수를 차지하여 로화현상이 엄중하였다.
그리하여 협회에서는 다시 상급부문에 신청하여 명칭을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로 고치고 회원자격을 강사이상으로 수정하였다. 이렇게 되여 협회에 많은 젊은피가 흘러들게 되였다. 이 토대우에서 협회에서는 젊은 인재를 뽑아 단기연수를 보냈고 또한 국외의 합작연구항목에도 참여시켰다.
 |
| 대학시절의 윤종주. |
 |
| 국가위생부의 파견에 의해 출국방문임무를 완수하고 귀국도중 북경의과대학 생화하학강자의 은사이신 류사직원사(오른편)와 장창영교수(왼편)님을 방문한 윤종주(1965년 11월). |
 |
| 일본에 히로사끼대학에 도착한후 연구실에서 사도 기요미(佐藤清美)교수와 함께(1980년). |
 |
| 류학생제도가 회복된후 연변대학 의학원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3명의 박사(왼쪽부터 윤종주, 오국용, 리재류). |
 |
|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리사장으로 재임기간 당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와 함께(1999년). |
 |
| 로기순동상앞에서(200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