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대학에 붙었어요…"
"사회 고마운분들의 덕분이예요…"
8일, 기자를 찾은 류소운(49살)씨가 첫마디로 한 말이다.
499점의 성적으로 올해 연변대학 의학원 간호학부에 붙은 임미녀학생(연길시2중 졸업)의 어머니 류소운씨는 생각만 해도 꿈만 같다. 생활난때문에 학교공부를 포기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던 딸이 대학에 붙다니. 그것도 한뉘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꼭 붙고야말겠다던 의학원에 입학했으니 말이다.
비록 대학등록금을 해결하지 못해 속이 타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금을 맡아 공부할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고 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고달팠던 지난 세월, 1989년 남편의 간경화복수로 모든 가산을 날리고 산골로 피난살이를 떠나면서부터 그녀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그녀는 앓는 남편과 네살배기, 두살배기 딸을 데리고 산골에서 버섯도 따고 농사도 지으면서 힘들게 살았는데 때로는 소들이 겨우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먹어치우는바람에 안타까와 엉엉 울기도 했다.
그때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료해한 당시 도문시 량수진 진장이 그녀한테 버섯공장을 맡겨주면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 끝내 빚을 물고 일정한 살림가구도 마련하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의 병이 또다시 도져 수술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녀가 엄청난 치료비때문에 갈팡질팡하고있을 때 도문시중의원 김성빈의사가 선뜻이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하여 그녀는 김성빈의사의 도움으로 수술하지 않고 남편의 병을 치료할수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병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사이 그녀의 두 딸은 이집저집을 떠돌며 있느라 공부도 바로 하지 못했다. 남의 집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살던 딸들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엄마의 손을 붙들고 정 힘들면 자기들을 고아원에 보내달라고까지 했다. 그녀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고 했다.
남편의 병이 차도가 보이자 그녀는 가족을 이끌고 연길에 들어와 연길 벽돌공장, 로무시장에서 닥치는대로 일거리를 찾아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학교가 문제였다. 전학하자면 돈이 필요했다. 하여 그녀는 부득불 아이들을 집에 두고 다닐수밖에 없었다. 한창 소학교를 다닐 나이에 그녀의 두 딸은 근 1년반이나 거리에서 헤매며 세월을 보냈다. 때론 동네 아이들한테서“공부를 못해 학교에 못간다”는 놀림을 당하고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달려온 딸을 볼 때면 그녀는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치면서 “어떻게 하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이 소식을 알게 된 주교육국 해당 책임자가 그들의 정황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직접 나서서 두 딸을 연남소학교에 넣어주었다.
딸들의 학교문제가 해결되자 2000년 남편이 또 담낭이 터져 대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수술비만 해도 1만여원, 그때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그의 사연을 방송하고 얼마간의 성금을 가져다주었으며 연남소학교 사생들이 6000원의 의연금을 모아주었다. 남편의 병치료를 위해 그녀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침일찍 일어나 쓰레기차도 끌었다. 당시 그들은 끼니를 제대로 에우지 못할 때가 푸술했다.
2003년 남편이 또 골결핵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다. 얼마후 남편을 돌보랴 바깥일을 하랴 지친 그녀도 허리병으로 드러눕고말았다. 하여 당시 연변공업학교를 다니던 큰딸 임호녀가 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둘째딸 임미녀도 고중공부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녀 집안에 온통 먹구름이 돌 때 당시 주부련회, 도문시민정국, 장백병원 등 여러 단위에서 사랑의 성금을 보내주었다.
드디여 풍전등화와도 같던 그녀 가정에 해살이 비쳐들었다. 그녀 남편은 장백병원의 도움으로 1년 동안의 무상치료를 받았으며 둘째딸도 계속 학교공부를 이어갈수 있었다.
한때는 너무나도 고달픈 삶때문에 온 가정이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던 그들이 이젠 떠오르는 아침해살을 맞이하게 됐다. 딸의 대학뒤바라지가 너무나도 힘들지만 그래도 희망을 안고 사는 그들이기에 다가오는 래일은 더욱더 찬란할것이다(글 사진 차순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