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저는 소영진당위 파견을 받고 연길시 교외에 자리잡고있는 인평촌으로 가서 인평촌 "촌사"를 집필하게 되였다. "촌사"를 집필하기 위해 저는 촌의 정황과 력사를 잘 알고있는 전임 촌로간부들과 로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정리하였다. 그런데 2003년 신풍촌, 문화촌, 인평촌을 합병하여 한개 촌으로 만들면서 촌사무실을 여러차례 옮기다보니 일부 원시자료를 분실하게 되였다. 그리고 촌지도부도 여러번 바뀌고 일부 로촌간부들이 이미 세상을 떴다. 하여 자료수집이 어려워졌다.
우리 조상들과 선배들이 피와 땀을 흘려 건설한 이 땅의 생생한 력사를 정확히 기록하고 후대들에게 진실한 사료를 전달하는것은 집필자로서 의무이다. 하여 자료수집의 어려움으로 오는 압력은 점점 커만졌다. 그러나 고난의 나날 적지 않은 촌간부들이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묵묵히 조국과 고향건설에 힘을 이바지해온 사료를 집필하는 당사자로서의 긍지감도 적지 않았다.
근 3개월간의 시간을 들여 원시자료를 다 수집할수 있었는데 유독 이미 타계한 원 신풍촌 저명한 벼재배전문가인 최죽송의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 만약 그의 사진이 "촌사"에 수록되지 않는다면 "촌사"의 이미지가 적지 않은 손실을 입게 되는 실정이였다.
최죽송(1915년-1973년)은 생전에 연길시 장백인민공사 사장 겸 신풍촌의 주임으로 사업했다. 최죽송은 생전에 세차례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며 우리 나라 북방의 저명한 벼재배전문가로 소문났고 전국로력모범이며 중국농업과학원 특약연구원, 길림성농업과학연구원으로 활약했다. 그의 연구성과는 국가 과학연구 2등상을, 1978년에는 국무원의 과학연구성과상을 획득하였다. 최죽송은 장기간 벼재배실천 가운데서 토양, 조기벼모내기, 심수 등 관개법과 같은 경험들을 총화하여 보귀한 자료를 남겼다.
1970년이래 신풍촌의 벼 무당 수확량은 900근-950근, 최고로 1000근에 도달하여 우리 나라 북방지구 벼재배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이런 분의 사진이 "촌사"에 수록되지 못한다면 너무나도 가석하고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하여 나는 신풍촌의 전임 서기인 엄문각에게 최죽송사진을 수집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한편 저는 "촌사"집필을 시작했다.
그렇게 기다림속에서 초조히 시간을 보내던 와중 엄서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최죽송의 사진을 얻었다고했다. 전화를 받은 저는 한걸음에 엄서기한테로 갔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였다.
최죽송의 흔적을 찾게 되였고 이로 인해 인평촌의 "촌사"를 원만히 마칠수 있었다.
정작 사진을 받아들고 보니 사진은 아니고 어느 잡지에 실린 최죽송의 사진이였다. 찬찬히 눈여겨 보니 60년대 "지부생활"잡지에 실린 사진이였다. 참 소중한 사진이였다. 세월이 이렇게 흐른 오늘날 "지부생활"을 통해 저는 다시한번 "지부생활"이 걸어온 60년 력사에 머리가 숙어졌고 우리의 친근한 벗임을 피부로 실감했다. 정말이지 "지부생활"이 지난 60년간 우리 조선족사회 변천의 력사를 생생한 력사현장속에서 상세하게 기록했으며 그 시대의 흐름과 방향을 정확히 반영하였다. "지부생활"잡지는 지나온 60년간 우리 말로 된 당간행물로서 그 역할과 진가를 남김없이 발휘했다.
저는 지난 60년간 "지부생활"을 꾸려온 전체 임직원들에게 무한한 경의와 존경심을 보내고싶다. 그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부생활"이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건재하고 더욱 존경을 받고있지 않나 생각한다.
저는 "지부생활" 애독자로서 앞으로 "지부생활"을 눈동자처럼 아끼고 "지부생활"의 임직원처럼 이 잡지와 운명을 같이하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