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붉은기"차 생산하여 업계의 공신으로 남다른 기술력으로 중남해의 특수인물로 장춘제1자동차그룹 승용차공장 부공장장으로 있다가 리직휴양한 최홍송( 85세) 은 민족브랜드"붉은기"표 승용차와의 인연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조선족사회의 화제인물로 되였었다.
■ 차와의 인연
왕청현 라자구태생인 최홍송은 16살때 전씨 성을 가진 조선인 운전기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운전술을 익히고 차수리를 배웠다.
1945년, 최홍송은 혁명에 참가한 형님을 찾아 도문위수사령부로 갔다가 당시 사령원이였던 요빈의 차를 몰게 되였다. 1947년, 요빈이 (지금의 흑룡강성 부성장 겸 할빈시 시장으로 가게 되였는데 최홍송도 함께 갔다. 그 이듬해 최홍송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 항미원조에 참가, 자동차기술참모로 있었고 1958년에 제남군구 모 부대로부터 전업하여 제1자동차공장 총조립직장 "붉은기"표 승용차개발소조에 배치되였다.
그때로부터 최홍송은 장장 38년 동안 "붉은기"와 정을 쌓았고 "붉은기"의 소리만 들어도 어느 부분에 고장이 났다는것을 인츰 알아냈다.
■ 모주석을 모셨던 날
요빈의 운전기사로 있던 1950년 2월말의 어느 날 그는 요빈으로부터 래일 차를 쓰지 않겠으니 전면 검사를 한 다음 오전 8시에 성당위빈관에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7일 오후, 최홍송은 명령을 받고 기차역 귀빈실문앞에 차를 세워놓았다. 당시 할빈시는 안전상황이 좋지 않았는바 사전에 누구를 모시는지 전혀 몰랐다. 오후 2시쯤 누군가가 뒤좌석에 올랐다. 최홍송이 얼핏 보니 모택동주석이 차에 오르는것이였다.
최홍송의 가슴은 쿵쿵 뛰였다. 그는 핸들을 꼭 잡은채 굳어있었고 후시경으로도 감히 모주석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모주석의 옆에는 요빈이 앉고 운전사 옆좌석에는 당시 모주석과 동행한 왕동흥이 앉았다. 모주석께서는 쏘련방문을 마치고 할빈시찰차로 머물게 된것이다.
"그때 나는 무슨 정신으로 빈관문앞까지 갔는지?빈관입구에 경사진 곳이 있는데 겨울이라 길이 미끄러웠지요. 평소 요빈을 모시고 그 곳을 지날 때면 차가 약간 움직거렸는데 모주석을 모시는 그날따라 묘하게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유. 빈관문앞에 당도하자 누군가 뒤에서 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 주었어유. 뒤를 돌아보니 모주석께서 미소를 머금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참 잘 몰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나의 손을 잡아주셨어요. 나의 얼굴은 삽시에 화끈 달아올랐지유. 모주석께서 차에서 내려서 조금 지나 주변에 있던 사업일군들이 우르르 나의 차에 올라 나와 악수했어요. 모주석께서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보고 모주석께서 잡아주셨던 나의 손을 잡으려고. 얼마나 행복했던지..."
최로인은 "이튿날 나는 모주석을 모시고 할빈시의 공장들을 돌았어요. 그후 최홍송이란 이름이 할빈시에 널리퍼졌고 특히 조선족단체들에서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는 긍지감을 느꼈대요."라며 행복에 잠겨있었다.
■"붉은기"표 승용차 생산의 기술골간
1958년, 최홍송이 제1자동차 공장에 갔을 때 승용차를 만들어 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승용차제조대오라 해야 소조에 불과하고 작업장소도 총조립직장의 한쪽에 유리로 칸막이한 작은 방이였다. 거의 아무런 설비가 없다싶이 했고 생산라인도 없었다. 단지 몇명 기능공들이 뚝딱거리면서 세계급 고급승용차를 만들려고 했다.
"붉은기"표승용차제조성공은 전적으로 정신의 걸작이며 민족의 기적이라 할수 있다.
최홍송은 오래동안 승용차를 몰아보았고 부대에서도 자동차기술참모로 있었는지라 자연 승용차소조의 기술골간으로 되였다.
승용차생산조건이 구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최홍송과 그의 동료들은 높은 정치적책임감과 모주석과 나라를 위해 승용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매일 밤 12시, 새벽 1시까지 일하고 끼니를 걸으면서도 피곤한줄 모르고 배고픈줄 몰랐다.
1959년 봄, 1958년에 만든 견본차 토대에서 좌석이 두줄인 "붉은기 72형" 고급승용차가 기적적으로 탄생, 반년도 채 안돼 10대의 "붉은기 72형" 승용차를 생산하여 국경축전에 보냈다.
5년후 30대의 "붉은기 72형" 승용차가 또 북경에 진출, 건국 15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했다. 그후 국무원에서는 "붉은기"표 승용차를 영빈차로 결정지었으며 구쏘련의 기스, 기므차를 대체했다.
1965년, 좌석이 세줄인 "붉은기 770형" 고급승용차가 최홍송과 그의 동료들 손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이며 북경시 시장으로 있던 팽진이 "내가 시험해보고 선전해 줄게요"하며 차를 남겼다. 팽진의 운전기사에 따르면 팽진은 어디를 가나 "770형" 차에 앉았고 가는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이를 민족의 자랑으로 여겼다.
1966년, 나라에서는 "붉은기"표 보험차(방탄차)를 만드는 임무를 제1자동차공장에 맡겼다. 나라에서는 모주석, 류소기, 주은래, 주덕에게 하루 빨리 보험차를 배치하려고 했다. 이 사업은 봉쇄된 상황에서 진행되였고 참가일군들에 대한 정치심사도 아주 엄밀했다. 최홍송은 당연히 이 대오의 기술골간으로 꼽혔다.
1969년 5•1전야 첫대의 붉은기보험차가 시험제작에 성공했다. 차조형이 좌석 세줄짜리 붉은기차와 같았고 특수강철판과 두꺼운 유리를 채용했기에 방탄력이 강했다. 특수 제조한 다이야는 탄알이 꿰뚫어도 바람이 새지 않는 특수기능이 있었다.
최홍송로인은 "듣는 말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방탄차중 "붉은기"보험차의 안전시스템이 제일 높았다. 그후 림표가 이 보험차에 앉아 도망칠 때 경위일군이 쏜 총알이 방풍용유리에 맞았는데 옅은 흔적만 남았을뿐이였다."며 자랑했다. 1972년 당과 국가 지도자들중 모주석이 제일 마지막으로 "붉은기"표 보험차에 앉으면서 이 승용차의 지위가 확정됐다.
■ 스스럼없이 중남해를 드나들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주은래총리는 자기의 6호 "붉은기"보험차를 닉슨전용차로 사용하게 하고 부인은 좌석이 세줄인 "붉은기"고급승용차를 사용하게 했다. 국무원에서는 최홍송을 "붉은기"승용차의 특별책임자로 지정했다.
북경에서의 방문을 마치고 닉슨은 항주에 가기로 했는데 승용차 두대를 군용운수기로 실어가야 했다. 운수기의 꼬리부분에 두개의 강철판을 걸쳐놓고 운수기안에 앞뒤차 사이에 주먹만한 거리를 남겨두고 두대를 세워야 했다. 두 차가 충돌하면 전반 접대사업에 큰 영향을 끼치는 아슬아슬한판이였다.
국가지도자들의 운전기사나 복무소의 운전기사들중 최홍송을 내놓고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최홍송은 후~ 숨을 들이쉬고는 핸들을 잡았다. 엔진소리에 맞춰 차는 정확하게 철판을 올라탔고 온당하게 운수기안에 착 들어섰다. 두번째 차량도 오차없이 바로 첫차 뒤에 딱 멈추어섰다. 모두 혀를 차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운수기에서 내려올 때도 최홍송은 마찬가지로 아주 침착하게 차를 세워놓았다.
그후 최홍송이 없는 상황에서 사업일군들은 차 두대를 어깨로 메여 운수기에 올려놓고 북경까지 실어왔다 한다.
많은 "붉은기"표 승용차가 북경에 진출하면서 제1자동차공장에서는 최홍송을 복무과 과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북경의 특수인물로도 되였다.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으며 국가의 중대 외사활동이 있을 때에는 꼭 그에게 "붉은기"표 승용차 검사수리를 맡겼다.
1985년, 제1자동차공장 승용차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있던 최홍송은 리직휴양하게 되였다.
많은 기업에서 높은 로임으로 그를 초빙하였지만 그는 승용차공장의 부탁을 받고 아무런 보수도 없이 장춘―중남해를 오가며 1996년까지 11년 동안 장춘제1자동차공장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1991년 6월, 최홍송은 전국 자동차업계의 유일한 로간부대표로 전국 로간부선진단위, 선진일군표창대회 및 우수간부좌담회에 참석하여 강택민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