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이번기부터 8기를 나눠 "개혁개방 30년- 변천의 연변"특집을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개혁개방 30년의 격변속에서 연변은 편벽지역과 미발달지역이란 "모자"를 벗고 지금은 다국적경제합작과 개발, 개방의 천초에 나서면서 길림성 동부의 중심지역으로 군림하고있다.
우리는 취재, 응모, 사진 등 다양한 보도형식으로 연변주가 개혁개방의 대가정속에서 경제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되고 사상이 부단히 해방되며 관념이 부단히 갱신되고 생활이 부단히 개선되며 개혁개방이 부단히 심입되고있는 참신한 모습을 대비수법을 통해 다각적으로 펼쳐드리려 한다.
개혁개방전의 연변은 봉페와 "고독의 경제"로 대칭될만큼 치벽지역으로 숨겨져왔다. 간신히 내지와 잇는 철도연선이 그나마 대도시권의 경제와 문화를 접할수 있는 "젖줄기"로 명맥을 이었었다.
허나 90년대에는 향상의 발판을 마련하고 2000년대에는 인기의 지역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연변은 "변천"에 가까울만치의 비약을 지속해왔다. 연변의 발전템포는 사실 다른 발달지역과 비하면 훨씬 늦지만 평균 9%의 발전속도를 지속했다는데 괄목할만 하다.
연변발전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것은 11기3차전원회의이래 중앙의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개혁을 심화하고 개척창신한다."는 방침이 제기되면서부터였다.
70년, 80년대까지만도 연변주 농업은 단순히 량식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한데 목적을 두었으나 90년대에 진입하면서 적응성농업과 효익성농업의 길을 걷기 시작, 시장맥락과 같이할수 있는 공예작물생산에 가동을 걸었다. 호도거리책임제를 진일보 완미화하는 기초하에서 농업구조조정을 다그쳐 지역특색을 발굴할수 있는 브랜드농업이란 신형의 농업생산발전에 밑거름을 깔기 시작했고 농업산업화를 목적으로 한 향진기업발전도 병행됐다.
새로운 농업발전사로로 하여 "기후변덕에 신음하던 연변농업"이 과학화, 산업화의 리념에서 온당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1998년 연변농업사에서 보기드문 저온랭해로 하여 량식생산이 1996년과 1997년에 비해 각각 4.9%, 2.1% 대폭 내려갔으나 1978년에 비하면 그래도 상승되는 수자를 보였다.
연변농업의 비약적인 도약은 2000년에 진입하면서부터였다.
연변주 농업종사일군은 약 36만명, 경작지 총면적은 27만헥타르에 달한다. 자연자원과 구역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대대적으로 "수확량이 높고 질이 좋으며 효률이 높은" 농작물재배를 추진하여 초보적으로 연변특색이 있는 중약재, 식용균버섯, 산나물식품, 록색입쌀 등 8개 주도산업을 형성하여 단일한 량식생산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다원화구조로 전변되고있다. 2006년 연변주 량식총생산액은 30억 1천만원에 달해 가격으로 비교하면 1952년의 7.07배, 1978년의 3.48배에 달한다. 농작물 총면적은 27만2천헥타르, 그중 량식재배면적은 22만 4천헥타르이고 공예작물면적은 3만 7천헥타르이다. 사료작물면적은 2080헥타르이고 중약재면적은 3만 2천헥타르이다. 량식생산량도 상승선을 긋고있는데 1978년 연변주 량식생산량은 54만톤에 달했으나 1990년에는 70만톤, 2005년에는 80만톤 대관을 넘겼으며 2006년에는 력사적으로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건국초기의 2.29배에 달했다.
연변공업은 30년간 비약에 가까운 발전을 가져왔다. 30년전에는 수공업을 방붙케하는 "야장간"식 단순공업이 주류를 쳤으나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의약, 식품, 방직, 림산가공, 야금 등 10여개 기둥산업들이 군체를 이루면서 공업을 리드해나가고있다.
연변공업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장식했던 1998년만 보아도 전 주 공업총생산액은 124억 4천만원에 달해 1978년의 5.2배로 도약했는데 련속 몇년간 년평균 9.6%라는 보기드문 발전속도를 보였다.
연변주 공업발전가운데서 제일 유표하게 안겨오는것이 경제주체의 다원화구조가 뚜렷해진것인데 그가운데서도 비공유제기업이 신속하게 장대된것이다. 각종 주식제, 외상투자기업, 개체사영기업과 기타 경제류형의 공업기업들이 속출, 이같은 증가는 국유기업을 훨씬 초월했다. 국유기업개조와 기제전환으로 전 주 248개 국유공업기업들이 국유경제가운데서 퇴출했다. 퇴출기업총수량은 전체 기업수의 74.5%에 달했고 국유자산퇴출액은 22억 5천여만원에 달했다.
"과학기술은 제1생산력"이란 주제하에 9개의 주직속과학기술연구소들은 초방형공업을 집약형을 위주로하는 신형의 공업으로 떠미는데 주력했다. 이같은 증장방식의 전이는 주도산업을 형성시켰다. 2000년에 진입하면서는 의약, 식품, 림산, 제지, 방직, 전력 등 우세산업이 초보적으로 형성되였다. 이런 우세산업들의 총자산은 175억 4천만원에 달해 전 주 공업비중의 72.1%를 차지했다. 우세산업은 살아남고 렬세산업은 퇴출하는 시장경제에 의한 공업운영기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공업기반은 튼튼해져만 갔다.
30년간 연변공업은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9.5"시기 연변공업은 량호한 기반을 마련했다면 "10.5"시기는 도약식의 튼튼한 발판을 마련했다. "11.5"시기에 진입하면서 구역경제합작과 연룡도일체화 등 규모화발전에 순응할수 있는 복합적인 공업에 시동을 걸었다.
2007년에 연변공업은 쾌속발전하는 태세를 보였다. 전구경공업증장액은 115억 7천만원을 실현하여 전 주 경제총량의 37.6%를 차지했다. 규모이상 공업증가액은 97억 4천만원으로서 리윤세금총액은 44억 1천만원에 달했고 리윤은 19억 9천만원에 달했으며 민영경제의 주영업수입은 417억원에 달해 전 주 경제총량의 41%를 차지했다.
금년에 들어서면서 공업증가폭은 역시 락관적이다. 1월부터 6월 사이만 보아도 연변공업은 속도와 효익에서 쌍풍작을 이룩하여 성정부에서 하달한 각항 목표임무를 완수했다. 즉 규모이상 기업들에서 루계로 111억 4천만원의 생산액을 실현하여 년간계획의 48.4% 실현했다. 이는 작년 같은 시기에 비해 33.0%의 장성을 이끌어낸셈이다. 공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률은 46.2%, 상반기 제품판매률도 95.4%를 보여 연변공업사상 최고치를 갱신했다.
지금의 연변공업은 지역에만 할애한 "고독의 공업"이 아니라 동북아지역경제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길림성 동부의 제조업을 명맥으로 이끌 공업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연변주 대외개방은 1989년을 전후로 서서히 템포를 떼기 시작, 국무원에서 훈춘을 진일보 개방할 변강개발도시로 선정하면서 두만강하류 다국적개발이란 천재일우의 기회포착에 주력했고 경제무역의 복사면을 넓히기 위한 "항구를 빌어 바다로 진출하자"란 전략적인 구호를 제기했다.
사실 1989년전 연변주 대외개방은 그리 큰 진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해에 대외무역액은 겨우 9.1%라는 미세한 증장폭을 이루어냈다. 허나 1991년에 진입하면서 16.9%라는 상승선을 긋기 시작했다.
연변의 대외무역과 교류는 형세의 흐름에 기복을 그리는 양상을 보여왔다. 1994년 대외무역은 44.6%라는 사상최고수준을 확보했으나 이듬해에는 20.9%로 급격히 하강됐다. 그후 몇년간 20% 선에서 배회했다. 이같은 부진은 2004년에 들어서면서 해소되기 시작하여 26.5%라는 갱신점을 확보했다. 이같은 증장수준은 현유 연변주 대외무역의 현실태를 희망적으로 보여주는 다소 안정한 증장선이다.
연변주 대외무역이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 1989년부터 2004년까지를 보면 대외무역의존도는 16%에서 24.4%로 상승했는데 1.8% 내지 3.3% 사이로 안정한 기복선을 그렸다. 그 주요한 원인은 조선, 한국, 로씨야, 일본 등을 잇는 규모의 화물운송코스가 정기, 비정기적으로 운행되면서 다각적인 무역래왕이 주선을 쳤기때문인것으로 풀이되고있다.
2004년부터 2007년은 규모대외무역에 물고를 터친 시기로 주변나라는 물론 미국, 유럽 등지에까지 복사망을 펼친 다각화, 다원화의 대외무역에 시동을 걸었다. 더우기 두만강국제합작개발이 국가의 중시범위에 들고 성급 차원의 "장, 길, 도"선도구건설이 추진되면서 연변대외무역은 획기적인 탄력을 받기시작했다.
2007년 연변수출입액은 14억딸라에 달해 그전해에 비해 25.7%라는 큰폭의 장성을 이룩, 단연 전 성 앞자리를 차지했다(본지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