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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적진에 잠복해 목숨 걸고 당중앙 구한 첩보전선의 전설 전장비

2021년 06월 09일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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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성 호주시렬사릉원내 동쪽에 중공 은페전선 ‘룡담삼걸’의 한 사람인 전장비 렬사 기념관이 있다. 올해는 전장비 렬사가 희생된 지 86돐이 된다. 전장비는 본명이 전장추이고 일명 전조라고도 불렸는데 절강 호주의 한 비단장사 가정에서 태여났다. 1915년 그는 북경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후에 북경에 남아 의료활동에 종사했다. 1926년에 처남 장섬중의 소개를 거쳐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후 전장비는 막부득이 가족을 데리고 상해로 갔다. 1928년 여름에 그는 한 무선전양성훈련반에 참가했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되여 호주 고향사람인 책임자 서은증의 인정을 받았으며 후에 그를 따라 남경에 가 국민당 정보기관에 들어갔다.

1929년 전장비는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국공산당 중앙특별행동과의 파견을 받고 국민당중앙 조직부 조사과에 들어가 조사과 주임 서은증의 기밀담당 비서관직을 맡았다.

전장비의 배치를 거쳐 리극농과 호저는 선후하여 국민당 특무기관에 들어갔고 리극농은 상해무선전관리국의 특무계장으로 되였으며 호저는 천진 ‘장성통신사’ 사장으로 되였다. 전장비 자신은 남경에 남아 《정원실업사》를 지키면서 국민당 정보기관인 《장강통신사》를 주관했다.

이렇게 3명 공산주의자가 국민당특무의 수뇌기관에서 철의 삼각편대를 형성하여 호랑이 굴에 침투했고 정보를 탐지하면서 한자루의 예리한 검처럼 국민당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로 하여 그들은 주은래로부터 정보계의 '룡담삼걸'로 불리웠다.

전장비의 전기적 생애에서 세인들이 칭송하는 한가지 특이한 공로는 목숨을 걸고 당중앙을 구원한 것이였다.

1931년 4월 24일 중앙특별행동과에서 보위사업을 책임진 제3과 과장 고순장이 체포되여 변절했다. 고순장은 중공중앙의 거의 모든 핵심비밀을 장악하고 있었고 상해 모든 지도자들의 가명 및 비밀주소와 전장비를 포함한 모든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변절은 당중앙에 대한 치명적인 재난으로 될 수 있었다.

띠띠따따 전보소리는 1931년 4월 25일 심야에 울려퍼졌다.이번 주말 밤에 서은증은 상해로 가면서 전장비를 남겨 《정원실업사》에서 야근당직을 맡겼는데 전장비는 무한에서 국민당 요원인 진립부와 서은증에게 련속 보내온 특급 극비전보 6통을 발견하여 직업적 민감성으로 여기에는 반드시 큰일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전장비는 더 생각하지 않고 과단성있게 극비전보를 뜯어 전보문 암호를 해독한 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보문에서는 “려명이 체포되여 이미 자수했다. 만약 남경으로 신속히 압송할 수 있다면 3일내에 중공중앙 기관을 모두 숙청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전보에서 지칭한 ‘려명’은 바로 고순장이였다.

위급한 시각에 전장비는 우리 당 지하교통원인 그의 사위 류기부를 밤새 상해로 보내여 리극농에게 통지하여 리극농이 정보를 가장 빠른 시간대에 주은래에게 알리도록 했다. 주은래는 신속하게 결단을 내려 상해의 당조직을 긴급 이전시키고 고순장과의 모든 련계를 차단했다.

국민당은 원래 중공중앙 기관을 일망타진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주은래 총리는 여러차례나 전장비동지가 아니였다면 우리들은 모두 국민당 반동파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장비는 신분이 폭로된 후 상해에서 철수하여 중앙쏘베트구역에 가 그의 홍색첩보원 생애를 끝내고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정치보위국 국장, 총참보부 제2국 부국장직을 력임하고 준의회의 후 홍군 총정치부 부비서장직을 맡았다.

1935년 3월말 전장비는 귀주 오강일대에서 국민당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부대와 련락이 끊겼고 후에 희생된 것으로 확정지었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