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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의 제일 영광스러운 아들 시황

2018년 12월 27일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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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청화의 제일 영광스러운 아들이고 청화의 최초의 공산당원이다. 그는 해방사업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시황의 혁명정신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이는 청화대학 도서관 로비의 벽에 있는 렬사기념비에 새겨진 한구절인데 청화의 학생이며 중국공산당 조기의 공산주의자이고 국제주의 전사이며 바이족인민의 우수한 아들인 시황을 기념하여 새긴 글이다.

시황은 자가 동생고 1900년 운남성 대리 바이족자치주 이원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917년에 청화학교(지금의 청화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는 학습에 부지런히 노력했으며 온갖 종류의 책을 많이 읽고 사고할 줄 알았으며 《신청년》 등 간행물을 읽기 좋아했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를 접수했다. 그는 국가대사를 관심하고 항상 국가와 민족의 전도, 운명을 걱정했다. 1919년에 5.4애국운동에 참가하고 청화학교의 진보적 사회단체인‘여름방학 수업단’ 발기와 설립에 참여했다. 1920년 이 사회단체는 ‘유진학회’로 개명되였고 시황이 회장을 맡았다. 1923년 가을, 시황은 청화학생회 회장으로 선출되였고 후에 광주에서 손중산 선생과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 사람인 리대소를 만났다. 리대소는 그들의 혁명활동을 열정적으로 긍정해주었고 그들의 투쟁정신을 고무격려했다. 리대소와의 만남을 통해 시황은 많은 사람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인생관을 확고히 다지게 되였고 중국의 사회현황 및 혁명투쟁의 복잡성, 간고성에 대해 더욱 심각한 인식을 가지게 되였으며 이는 후에 그가 확고부동하게 혁명의 길을 견지하는 데 심원한 영향을 일으켰다.

1924년 7월, 시황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학습기간 그는 경상적으로 미국공산당조직의 여러가지 반제활동에 참가했으며 대량의 맑스-레닌주의 저작을 열독했다. 미국공산당조직의 령도하에 시황 등은 ‘아메리카화교 및 중국로동혁명대동맹을 설립하였고 《국민일보》 (후에는 《화교일보》) 등을 창간하였으며 애국교포들을 단결시켜 국내의 반제애국운동을 성원했다. 1927년 3월, 시황은 미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미국공산당중앙 중국국의 초임 서기로 당선되였다. 미국공산당 중앙의 령도하에 시황은 화교와 류학생들 속에서 공산주의와 중국혁명을 선전하였고 당조직을 건립하였다. 그는 여러번 남경 국민당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았으며 운남에 있는 그의 고향집도 차압당했다. 백색테로의 위협앞에서 시황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혁명을 끝까지 견지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확고히 다지였다.

1928년 12월, 시황은 미국공산당 중앙의 파견을 받고 꾸바, 카나다에 가서 화교들 속에서 공산당의 비밀조직을 발전시켰다. 1929년 시황은 당조직의 파견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공부했다. 사업을 잘하는 동시에 그는 모든 기회를 틀어쥐고 체계적으로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학습했고 로동조합을 조직하고 군중투쟁을 전개하는 경험과 방법을 학습했다.

1930년 가을, 시황은 쏘련에서 귀국하여 선후하여 중공중앙기관, 향항선원공회 등 곳에서 사업했다. 그는 또 당의 파견을 받고 하북에 가서 선후하여 중공하북성위 위원 겸 선전부장, 중공하북성위 서기를 력임했다. 1933년 겨울, 시황은 북평에서 회의를 소집할 때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즉각 남경으로 압송되였다. 감옥에서 그는 잔혹한 적들의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굴할 줄 몰랐고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였으며 반동파들의 죄행을 여지없이 규탄하였다. 그는 혁명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공산주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34년초 시황은 반동파들에 의해 남경에서 살해되였는데 그때 나이는 34살밖에 안되였다.

래원: 연변일보(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