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련상케 하는 이 곳, 대련은 동서방문화가 서로 부딪치며 융합되여가고있으며 우리 나라56개 민족이 살고있는 곳이다. 특히 개혁개방후로부터 근 5만명이 넘는 우리 민족이 이 곳으로 찾아와 행복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삶의 터전을 닦고있다. 그러는 가운데서 우리 민족중에서는 타민족의 승인을 받는 우수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몇해전 《대련일보》에서 《모택동을 만난 대련의 다섯번째 사람》이란 제목으로 모택동과 함께 있는 한 젊은이의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이 눈에 띄게 실렸다. 그 젊은이가 바로 지금 80 고령을 넘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신 대련경비구 련락부 원 부장겸 대련련락소 소장으로 계셨던 김도영부장이시다. 오늘도 대련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김부장이라고 부른다.
한때 대련시조선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던 나는 김부장과 련계를 가지면서 그에 대한 두터운 존경심을 쌓지 않을수가 없었다. 김부장의 정직한 품성과 사심없는 경계 및 굳센 의지력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무딘 필로서라도 그이의 고상한 품덕을 세상사람들에게 알리고저 필을 들었다. 때마침 2008년 12월 13일, 김부장의 일기를 전시하는 기회를 가질수가 있었다. 장장 6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써놓은 일기를 뭇사람들의 축하속에서 전시되는 순간, 그의 빛나는 사적들이 마치 조수마냥 나의 눈앞으로 밀려왔다.
2008년 8월 8일 거세주목하는 북경올림픽개최일은 김부장의 80생신날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날을 기억하고있었을가. 그이의 부하, 동료, 친구… 그이의 생일파티에 참가하겠다고 전화가 비발처럼 날아왔다. 그러나 그이는 옛전우와 저까지 단 다섯쌍의 부부만 초대하여 간소하게 식사를 했고 생신축하로 들어온 5000원마저 하나도 남김없이 대련시조선족학교에다 기부했다. 생일을 리용하여 안속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사회인데 김부장은 되려 남들한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부담을 줄수는 없다는것이였다. 우리의 돈도 기어코 마다하다 못해 받아넣었지만 그 이튿날로 학교에 내놓는것은 참으로 우리의 귀감이 아닐수가 없다.
해마다 《6.1》국제아동절이면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사다주던 장면, 옛전우와 함께 조선족 학교에다 악기를 기증하던 옛이야기…
학생들의 열렬한 박수소리와 경모어린 눈길속에서 혁명전통교육과 민족전통교육보고를 열토하던 그 모습…
김부장은 한평생 이렇게 살아오신 분이시였다.
■ 정직한 품성
2002년12월9일 나는 김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대련시조선족문화예술관의 신서기와 함께 중국조선족로홍군 리화림녀사의 유물을 학교로 싣고오는중이니 학교에서 간직하라는것이였다.
차가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들은 그 유물을 학교 5층에다 조심스레 모셔다놓았다. 김부장은 사전에 이미 밝혀놓은 매 유물의 명칭을 세밀하게 재확인해보고 그 유물들을 빠짐없이 하나 하나 점검했다. 마치 친자식이 어머님의 유물을 정리하듯이 그처럼 참답고 그처럼 섬세할수가 없었다. 나는 김부장의 로홍군에 대한 숭모의 감성과 알뜰한 정성에 감동되여 학교의 라두만총무주임에게 알심들여 보관하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내가 알기로는 중국조선족로홍군중에 리화림녀사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분이시다. 그의 슬하에는 자식이 없었고 독신으로 평생 소박한 모습으로 살아오셨다. 평소에 그가 아끼고 절약하여 모은 돈 몇만원을 당비로 조직에 기부하고 아동기금회에도 기부하였으며 생명의 종점까지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무렵인 1998년 9월 28일 대련시조선족학교 새 교사락성 및 초중부설립 대회에 참석하시여 인민페5만원을 기부하셨다.
1999년 2월 10일 로홍군 리화림녀사는 95세의 고령으로 조용히 집에서 세상을 뜨셨다. 이 소식을 접하자 김부장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부리나케 그의 옆으로 달려가 발벗고 후사처리에 나서서 아들역을 담당했다. 즉시 대련조선족유지인사들을 모아 놓고 후사처리를 토의하며 조선족학교의 30명소선대원들을 조직하여 추도식에 참가할것을 제의했다. 나는 소선대원 30명과 교직원을 조직해 영결식에 참석했다. 김부장께서 친히 사람들을 거느려 리화림녀사의 유골을 단동 압록강물에 띄웠으며 후인들에게 리화림녀사의 사적을 반드시 알려야 된다는 필요성을 감안하여 《리화림의 일생》이란 비디오를 작성하게 했고 그것을 대련시조선족 각계 인사들과 전체 조선족학교의 사생들에게 관람시켜 리화림생평전시회를 가졌다.
아들아닌 김부장께서 친아들을 초월하여 리화림녀사의 후일을 완벽히 처리한것은 로홍군에 대한 존경과 애착심이였으며 또한 그이의 참답고 고상한 인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 사심없는 경계
김부장은 무엇보다 후대성장에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계셨다. 학교의 후진생을 이끌려고 나에게 학생 두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김부장은 우선 그들의 참다운 벗으로 되기에 노력했다. 학생들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속심말을 나누고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려주군 했다. 그러면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학생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김부장과 친구가 되여서 자기의 기쁨과 번뇌 등 속심을 숨김없이 털어놓게 되였다. 학생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여긴 김부장은 그들의 마음속매듭을 풀어주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비판보다는 타이름과 칭찬 그리고 많은 사랑과 믿음을 아끼지 않았다. 한동안이 지나자 학생들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학습의 진보에는 학습습관이 자못 중요하다. 하지만 옳바른 학습습관의 형성은 결코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였다. 김부장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여주고 일기쓰는 과정중에서 얻은 보귀한 체험을 들려주며 어떤 일을 해도 침착하고 꾸준히 견지하면 성공할수 있다는 인생의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영웅성장의 간고한 이야기를 자주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는 책도 추천해주었다. 그의 후덥고 정직한 인품, 고상한 정신경계가 말없이 학생들의 인생등대로 되여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학생들은 김부장 집에 놀러 가길 무척 좋아했고 김부장과 벗으로 된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홀가분한 마음을 지니고 목표있게 공부한 그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전보다 제고되였으며 학습의 즐거움도 되찾았다. 부모들이 기뻐했고 김부장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여올랐다.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는가 하면 대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 또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가 않는다.
어느 날 내가 김부장을 모시고 우리 학교 고중졸업식에 참가하려고 대련청소년궁으로 가고있었는데 나란히 걷던 그이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면서 바닥에서 무엇을 주어서는 준비한 봉투속에 넣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사람들이 쓰고버린 낡은 바떼리를 모으고있었다. 페물가운데서도 바떼리만큼 환경오염이 큰 페물은 없다는것이였다. 그이는 이미 몇년을 이렇게 견지해오는데 이미 2만3천여개의 낡은 바떼리를 주어서 다섯개 밀가루포대에 넣었다고 감명깊게 말했다. 조선족학교에서 청소년궁까지 멀지 않은 거리지만 그는 낡은 바떼리를 네개나 줏는것이였다. 그리고 무거운 어조로 《한개의 낡은 바떼리가 1m2의 땅을 오염시키는데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오? 하루 속히 낡은 바떼리를 주을 필요가 없어지면 얼마나 좋겠소. 그렇다면 나도 한시름 놓을텐데…》라고 한숨을 내쉬는것이였다.
그가 낡은 바떼리 줏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재미나는 일도 봉착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한번은 낡은 바떼리 주으려고 허리를 굽혔는데 한 젊은이가 이 령감이 무슨 보물이라도 주으려는줄 알고 급히 빼앗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 어떤 보배가 아닌 낡은 바떼리란걸 알고나서 두 눈을 부라리며 김부장을 《바보령감》이라고 욕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무용지물》을 줏는 년장자와 《유용지물》을 탐내는 젊은이의 확연히 다른 행동에서 나는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비천한가를 되새기게 되였고 앞에서 천천히 걷는 김부장의 모습을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을수가 없었다. 팔십고령에 그 몸도 허약해졌고 키도 몇해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어쩐지 예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거룩해보였다.
그는 후대와 대자연에 무한한 사랑을 몰부었을뿐만 아니라 약자에게도 지극한 사랑을 지니고 계셨다.
그가 자신의 안각막과 유체까지 기증하려고 해당 부문과 협의서까지 체결했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런 결단을 내릴수 있었는가고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니 그는 《현재 우리 나라에 400만명의 망인들중에 소수의 사람들이 타인이 제공한 안각막으로 광명을 다시 찾았지만 안각막의 부족으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몸부림을 치고있기에 내가 안각막을 기증하기로 결심했소. 마침 2008년3월5일 대련시적십자회에서 조직한 》유체기증 자원자의 벗《활동에 참가하게 되여 나는 부인과 함께 유체기부협의서에 정식 등록수표를 했소.》라고 말했다.
《생로병사란 어쩔수 없는 자연법칙이오니 아침노을도 저녁 노을도 인간세상 비추리라!》
이 바로 김부장의 인생경계를 말해주고있다.
환하게 웃으시며 그 념원을 토로하신 김부장님, 인민을 위해 자신을 깡그리 바치려는 김부장님, 림종시에 가서도 약자를 잊지 않으려는 존경스러운 김부장님, 실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 굳센 의지력
나는 해마다 몇번씩 김부장의 집을 찾아뵙군 한다. 그의 서재에 들어설 때마다 줄줄이 꽂혀있는 일기책들이 한눈에 안겨오군 한다. 김부장은 61년간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고 674만자로 된 100권의 일기를 써오셨다. 그 속엔 그이의 불타는 청춘시절과 위풍당당한 군인 풍채가 적혀 있는가 하면 인생의 쓰라림과 휘황한 인생발자취도 력력히 적혀있다. 실로 한부의 진귀한 력사서적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그는 일기책의 내용을 뽑아《붉은 잎》 이란 책도 묶어 발표했고 8만자로 된 《히말라야의 총소리》 등 70여편의 글을 써서 발표했다.
1947년, 18세의 젊은 소학교 교장인 김도영은 첫장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어느덧 61년이란 세월장하가 그의 필끝으로 흘러가버렸다. 잔잔한 물결마냥 그 하루하루의 일기는 한번도 끊기지 않은채 그의 인생드라마를 엮어주었다.
그의 대하드라마같은 일기에서 단 몇편을 뽑아 이 자리에 적어본다.
1947년3월19일 수요일
… 밤에 토지분배위원들과 회의를 열었다. 인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한 토지의 등급을 하나하나 토론결정하였다. 그리고 농민들 현재의 생활정도와 로동력의 조건을 보아 매호마다 등급을 매겨 제일 곤난한 농호에게 제일 좋은 땅을 배당하도록 하였다…
1953년2월1일
전쟁은 참혹하다. 산야는 포화에 불타오르고 골짜기에는 시체가 쌓여 피가 흐른다… 전우여, 낯모르는 동포여! 만약 내가 미제와의 싸움에서 인류해방의 꽃이 되였다면 나의 시체보다도 수많은 영웅들의 투쟁과 생활이 적혀있는 이 일기책만을 중국 고향땅에 전해달라.
2004년5월1일
…로년기의 행복이란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작은것들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린근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해보라. 이러한 봉사는 라태를 예방하고 나 아닌 타인을 위한다는 보람과 긍지, 소외감없는 공동체의식 등을 얻게 될것이다…
2004년6월23일
인간의 행복은 개인의 안위와 향락을 누라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데 있다. 얼마나 아느냐보다 아는것을 남을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은 어떤 힘이 그의 뒤받침으로 되여 심혈어린 글발을 적게 하였을가? 라고 생각한다. 진지하고 소박한 그 정감을 기록하는 즐거움, 단 일기책과 숨김없이 대화할수 있는 친구같은 기분, 인생과 력사를 기록하는 사명감에서 온것이 아닐가? 그는 일기책을 영원히 배신 모르는 친구로 간주하며 그와 일일불견 여격삼추 (一日不숨 如 隔三秋)란 정을 맺었다. 61년의 일기속엔 탁월한 의지와 굳은 신념이 숨어있음을 의심할바 없다. 이 일기야말로 기네스대전에 오름에도 손색이 없을것이다!
김부장의 서재에는 1960년10월 모택동주석과 조선인민군 대표단 단장 장서환과 함께 담화하는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청춘의 매력으로 차넘치는 김부장이 중간에서 통역하고 계셨다. 이 사진이 바로 《대련일보》에 실린 사진이였다. 세월은 무정했다. 어느덧 팔십고개에 들어섰으니 위인인들 어쩔소냐? 하지만 그의 일기만은 영원히 늙지 않을것이며 기록된 청춘의 정감만이 영원히 그대로 활기를 보여주고있을것이다.
김부장님, 그는 한아름의 정신재부를 간직한 고상한 인생소유자이시다. 그의 보람찬 인생과 그의 일기만이 후손들에게 영원히 유익한 계시를 안겨다줄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계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