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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
2008년 10월 14일 09:02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1956년에 북경에 회의가 있어 갔었는데 민족학원에 가보자고 하기에 따라갔다. 그때 몽골족 우란후가 교장으로 학교에는 한족과 몽골족뿐이였고 조선족은 한명도 없었다. 주덕해주장은 ‘왜 없느냐?’ 하며 조선언어학부를 세우도록 우란후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하여 민족학원에 조선언어학부가 있게 되였고 장족도 후에 간것으로 알고있다.”

1950년대만 하더라고 전반 국민경제는 회복단계에 처해있었다. 농업은 국민경제의 토대라는것을 감안한 주덕해동지는 연변의 농업발전을 가장 큰 과업으로 틀어쥐었다.

실사구시적인 태도로 일하는 그는 연변에 산지가 많아 기계화를 실현하기 어렵다면서 집집마다 황소를 나누어 키우게 했다. 집체에서 사양할 때 여위여 볼꼴없던 황소들을 개인들에게 나눠주자 금방 살지기 시작했고 농사일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 주덕해주장은 이처럼 모든 일을 실제로부터 출발해 처사하였다. 그러면서도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농사를 과학적으로 하기 위해 그는 전문기술일군들을 많이 양성했으며 집단농장의 대표인 김시룡을 도와 첫 농민대학인 연변새벽대학을 세웠다.

민둥산에서 과수농사를 할수 있다고 판단한 주덕해는 농민들을 동원, 우선 룡정 서산언덕에 시험적으로 사과배묘목을 옮겨 심게 하였다. 그리고 룡정 대소를 찾아보고 사과나무를 재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과수는 잘 되였다. 10여년의 노력을 거쳐 두 과수원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모아산으로부터 비암산에 이르는 연변과수농장은 “만무과원”으로 소문높았고 대소사과농장도 1000여헥타르의 큰 과수농장으로 변하였다. 지금 연변에는 과수원이 8만여무나 있고 그중 룡정의 사과배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주덕해주장은 또 벼농사에는 물이 많이 수요된다고 생각하고 수리공사를 벌였다. 화룡현 원봉평원을 답사한 주덕해는 1956년 원봉언제공사를 시작해 1958년에 완수하였다. 그리하여 원봉평원 수백헥타르의 한전이 논으로 변했고 원봉고원의 농민들은 보리를 먹지 않고 이밥을 먹게 되였다. 그후 1959년 고동하의 물을 해란강에 끌어들이는 고동하공사가 준공되였다. 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해란강 량안 2000여헥타르 논에 물공급이 충족하게 되였고 2500여 헥타르의 한전이 논으로 바뀌게 되였다. 이해 안도저수지공사가 시작, 안도저수지가 준공됨에 따라 안도현 명월구, 연길시와 연길현의 물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였다. 그외에도 화룡현 아동저수지공사, 석국저수지공사가 련이어 시작되였다.

당의 훌륭한 민족정책을 참답게 집행하고 연변인민의 질고를 실사구시적으로 해결해 주고 대변해주는 걸출한 민족대표 주덕해가 있음으로 하여 광범한 연변인민들은 연변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가꾸어갔다.

조국의 동부변강에는 춤과 노래의 고향 연변이 있게 되었다. 이 땅의 주인 된 조선족인민들은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신근한 로동으로 농사를 짓고 뜨거운 열정으로 공업건설에 뛰여들었다. 연변의 교육, 문화도 전면발전되였다. 연변조선족인민들은 당의 민족정책의 빛발아래 사회주의 한길에서 만강의 열정으로 일하고 또 일하였다.

1929년에 혁명에 참가하고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주덕해는 50여년간 줄곧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사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사회주의 건설시기 이렇게 반세기의 격정시대를 살아오면서 주덕해는 항상 인민들과 호흡을 같이 했으며 공산주의자로서의 인도주의정신으로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순박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난 주덕해는 실사구시적인 사업태도로 일했고 생활면에서도 매우 소박하였다.

주덕해의 처남이며 원 연변대학 외국어학부 교수인 김영규로인은 주덕해의 소박한 생활상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술도 마시는데 주로 잎담배를 많이 피웠다. 집에서 맑스저작을 그냥 보았고 연변1중과 기타 학교를 세우고 농민들을 많이 관심했다. 한번은 아이들이 사탕과자를 먹지 못하는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누룽지에다 사탕가루를 바르면 과자가 아닌가?’하면서 사탕누룽지를 가득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었고 로인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성격은 조용한편이구 어느 친척을 감싸는 법이 없이 원칙에 따라 처사했다.”

10여년간 주덕해의 신변경위원으로 일했던 박갑송로인은 주덕해와 인연을 맺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인상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1953년말부터 주덕해주장의 신변경호원 겸 비서로 있게 되였다. 문자는 안되지만 근 10년 남짓이 일했는데 주덕해주장가 나를 경위원으로 선정한것은 내가 고아이고 또 당원이였기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안도현출신이다. 주덕해주장에 대한 첫인상라면 가장 귀중한것이 실사구시태도였다. 그는 종래로 구두를 신지 않고 헝겁신만 신었다. 농촌집에 가서 늘 감자로 끼니를 에우군 했었는데 꼭 돈을 내고갔다. 내 이름이 박갑송인데 주덕해주장은 늘 “밥갑시”라고 불렀다. 그것은 ‘식사하고 밥값을 냈는가?’ 하는 말로서 주덕해주장은 그냥 나를 ‘밥갑시’라고 롱조로 부르군 했다. 나는 후에 주덕해주장의 추천으로 중앙민족학원에서 6년 공부하고 성조직부에서 일하다기 퇴직했다.”

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의 령도하에 연변인민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힘 다 하고있는 때에 뜻하지 않게1966년에 정치폭풍이 불어쳤다.

1967년 모원신을 두목으로 하는 강경파들이 연변에 들어오면서 정치적대혼란을 빚어냈다.

먹장구름이 뒤덮힌 연변대지였다. 먹장구름은 끝내 연변인민의 걸출한 대표인 주덕해를 삼켜버렸다. “한사코 개조하지 않고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 “지방민족주의분자”, “외국특무”, “반역자” 등 터무니없는 죄명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주덕해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싸우면서 진리를 견지하였다. 당중앙과 주은래 총리는 주덕해를 관심하면서 그를 보호하기에 힘썼다. 1967년 투쟁이 더욱 가심해지자 주은래 총리는 소란을 피해 북경에 와서 학습하라고 주덕해에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반란파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연길에 있는 주덕해 가정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주덕해의 부인 김영순과 두 아들을 보호하여 북경에 빼돌린 원 연변대학 인사처 처장인 로동문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1967년 무단투쟁이 일어났고 홍위병들이 주덕해집을 털어갔다. 7월 26일, 길에서 주덕해 처남댁을 만나 그집이 털렸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달려가보니 모두 털려있었다. 이불안에 숨겨둔 시계도 가져갔고 심지어 옷가지나 신까지 가져가 김영순부인과 아이들은 그냥 잠옷차림이였다. 그래서 주에 있는 장룡준을 불렀습니다. 그때 모두 연변대학 물리학부 학생이였다. 그리하여 장룡준, 김성걸과 토론하고 북경으로 빼돌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밤에 학생들을 데리고 매복했다가 빼돌리려 했다. 김영순부인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면 더 투쟁맞는다고 싫다고 했다. 그때 나는 ‘피신한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붙잡혀갔다면 되지 않는가?’하고 설복시켜 이튿날 계획에 따라 역에 나갔다. 김영순부인은 우리가 준비한 한복을 입고 왕청 배초구를 거쳐 할빈으로 해서 북경에 갔다. 그때 북경에 가서 누구네 집에 있겠는가도 문제였다. 민족학원의 서영섭선생이 김영화선생네 집에 피신하도록 알선했다. 그래서 민족대학 김영화선생네 집에 몸을 피하게 되였다. 그후 그 집도 외국특무선에 걸려 많이 고생한것으로 알고있다. 참으로 고난의 한단락력사였다.”

“문화대혁명”기간 연변대학 학생이였던 로동문, 장룡준, 김성걸 등 세 사람은 주덕해를 보호해나섰고 홍위병들의 눈을 피해 주덕해가족을 북경으로 피신시켰다. 이로하여 그들은 후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진리를 견지하고 홍위병들에게 타협하지 않은 로동문은 그후 모진 투쟁을 받았고 사업과 가정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후에 주덕해의 루명이 벗겨지자 그는 다시 연변대학에서 인사처일을 맡아 보게 되였다. 1969년 정세가 더욱 가심해짐에 따라 주덕해는 기타 지도일군들과 함께 호북성 63농장에 내려가게 되였다. 그곳에서 모진 육체로동을 하는 과정에 그는 페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계속 그를 억압하면서 약도 먹지 못하게 하였다.

1972년 병환에 시달리던 주덕해는 주은래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것을 요구했고 또 진리를 견지할 뜻을 표하였다. 주은래총리는 즉시 답장과 함께 약을 보냈다. 그러나 병환이 심해진 주덕해는 1972년 7월 3일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8년 6월 연변에서는 “주덕해동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할데 관한 중공연변주위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진리를 견지한 진정한 공산주의자이며 연변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주덕해의 공적은 드디여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되였다.

1986년 7월 3일, 연변인민들은 민족의 걸출한 대표이며 연변인민의 탁월한 지도자인 주덕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연길시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주덕해의 일생은 혁명적일생이였고 전투적일생이였으며 영광스러운 일생이였다. 그는 장기간의 혁명투쟁에서 시련을 이겨낸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고 중국조선민족의 걸출한 정치활동가이며 당과 인민에게 충성을 다한 공산주의전사였다. 연변인민은 민족의 걸출한 대표 주덕해를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

  래원: 종합신문 (편집: 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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