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조선의용군 남만제1지대가 국내의 정치 군사형세의 수요에 따라 1945년 11월하순에 심양으로부터 통화로 이동하여온후 1946년 1월에 사령부에서는 선전대를 꾸릴것을 결정하고 정치부에서 사업하고있던 주홍성에게 조직사업을 맡겼다.
주홍성은 김성춘과 같이 각 부대를 찾아다니면서 문예방면에 소질이 있는 인재들을 물색하는 한편 당지의 청년단조직에서 문예활동을 하고있던 주선우, 최득화, 김우수 등을 입대시켰다. 각 부대에서 물색한 전사들로는 딴스춤을 잘 춘다는 김인애, 량상호, 해방전부터 조선 강계일대에서 연극을 하였다는 지봉래, 통화중학교 음악교원이였던 리춘회와 음악과 무용에 소질이 있는 일부 학생 등 모두 40여명이였는데 통화에 자리잡고있던 리홍광지대 사령부에 집결되였다.
■ 연극 “리홍광”으로 문예선전대 첫발
이 문예대오는 모택동동지의 문예사상을 지침으로 삼고 당의 문예방침, 정책에 따라 선전고동활동과 문예공연을 힘있게 벌였다. 리홍광지대의 사령원 왕자인, 정치위원 방호산, 정치부 주임 홍림 등 지도동지들은 늘 선전대에 찾아와서 사업상에 존재한 애로를 료해하고 문예창작에 대한 지도성적인 지시도 하면서 우리를 고무해주고 편달하여주었다. 하여 100여명이나 되는 이 문예선전대오는 당조직의 주위에 굳게 뭉쳐 활동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조직과장 심청, 선교과장 최아림, 직덕명 등 지도동지들이 선참으로 2막 3장으로 된 연극대본 “리홍광”을 써내였는데 이 극본은 사령부 선전대가 성립된후의 작품으로서 해방후 처음으로 맞는 음력설기간에 공연하기로 되였다. 하여 선전대에서는 낮과 밤이 따로 없이 10여일간 악전고투하며 련습했다. 바야흐로 지도일군들에게 심사를 마치려는 때에 사령부에서는 긴급집합명령을 내렸다. 인원보고가 끝나자 김성춘대장은 2월 3일날에 놈들이 일으킨다는 폭란을 진압할데 대한 일급전투명령을 내렸다. 그때 선전대에서는 사령부를 보위할 임무를 맡게 되였다.
“2.3”폭란이 진압된후 사령부에서는 폭란진압을 반영한 연극을 창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득화, 주선우, 김우수 등 동지들은 그날밤으로 활보극을 창작하였다. 창작인원들이 직접 배역을 담당하고 련습하였는데 3일만에 지방 양걸대와 같이 거리로 다니며 공연하였다.
“2.3”폭란으로 말미암아 련습을 잠시 중지하였던 연극 “리홍광”은 1946년 2월하순부터 무대에 올랐는데 그후 통화, 삼원포, 류하, 매하구, 쾌다모자 등지에서 공연되였다.
이에 앞서 1945년 10월 어느날 우리는 흥경현(신빈현)으로 처음 입성하는 조선의용군 제5대대를 영접하게 되였는데 그 준비로 우리는 흥경현 청년문예대원들과 남산학교 일부 학생들을 동원하여 문예공연을 조직하였다. 그후 나는 대대에서 꾸리는 청년학습반에 참가하였는데 이 학습반을 졸업하는 날 안종주대대장은 나에게 5대대 선전대를 꾸릴 임무를 맡겼다. 나는 이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돌아오자마자 한선도, 리경수, 최옥성 등 10여명의 청년들을 동원하였다. 바로 이때 무순에서 “의용군위문단”이 흥경으로 왔다. 그 일행은 정진옥(바이올린수), 문재동(기타수), 리도삼(재즈북수), 리인옥(남고음가수), 니까니시마리꼬(녀고음가수), 나시다리지도세(녀무용수), 미쯔미 기미꼬(녀무용수) 등 7명이였다. 그들은 오자마자 련 사흘동안 계속 공연을 하였다. 그들의 공연종목에는 남성독창 “희망은 부른다”, “새농군의 노래”(석광희 작사, 정진옥 작곡), 녀성독창 “노들강변”, “축배의 노래”, 경음악 “대지의 항구”, “목포의 눈물”, “다뉴브강의 물결”, 바이올린독주 “류랑자의 노래”, 민요련곡, 바레무용형식으로 된 쌍무 “검은 눈동자”, “라 콤파루시다”, “당고” 등이 있었다.
1946년 3월 8일에 무순에서 온 위문단과 흥경의 청년문예대오가 합병하여 동북조선의용군 남만제1지대 5대대 선전대를 정식으로 성립하였다. 5대대 선전간사로 사업하던 문일평동무가 선전대를 림시 책임졌다. 30여명의 성원중에서 15명을 뽑아 취주악대를 편성하고 련습에 달라붙었는데 1개월만에 “팔로군행진곡”, “조선의용군 행진곡”, “3대규률 8항주의”, “최후의 결전”, “희망은 부른다”, “조국향해 나가자” 등 행진곡을 행진하면서 연주할수 있게 되였다.
■ 남만제1지대 5대대 선전대 설립
1946년 3월하순 선전대는 대대와 함께 통화로 옮겨와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사령부선전대에 편입되였다. 이때 청원에서 온 리돈화, 지종원, 정병갑, 정인현, 계일성 등과 매하구에서 온 윤광복, 신덕순, 리연수, 김옥순 등이 사령부선전대에 편입되였다.
1946년 4월초부터 사령부선전대에는 각 방면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정돈을 거친후 전체 성원은 도합 80여명이 되였다. 그중 취주악대가 30명이다. 사령부에서는 선전대의 조직체계와 주요책임자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선전대 대장에 김성춘, 지도원에 주홍성, 음악대 책임자에 리춘희, 무용대 책임자에 김인애, 연극대 책임자에 지봉래, 문일평, 창작조성원에 주선우, 김우수, 최득화, 지휘에 정진옥 등이였다. 사령부에서는 선전대에 “5.1”국제로동절에 공연할 새로운 종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를 받은 창작조에서는 알심들여 창작하였고 각 대에서도 맡은 종목을 열성적으로 련습하였다. 사령부에서는 정진옥을 “2.3”폭란때에 포로한 원 관동군군악대 지휘에게서 화성학과 편곡법을 개별적으로 배우도록 배치하여주었다. 그후 정진옥이 새로 편곡한 악곡으로 “팔로군행진곡”, “의용군행진곡”, “조국향해 나가자” 등이였는데 편곡이 잘 되였고 련습을 엄격히 틀어쥔데서 합주가 훌륭하게 되였다. 그외에도 많은 종목들이 준비되였는데 합창종목은 집체 작사 정진옥 작곡인 “리홍광지대의 노래”와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 “닐리리”였고 무용종목으로는 독무 “쏘련답보춤”(김인애 독무), “스케트춤”(량상호), 쌍무 “닐리리”(김영무, 전춘희), 집체무 “호미타령”(윤광복 등 8명), 집체무 “쏘련 따따르춤”(신덕순 등 8명), 집체무 “천안삼거리”, “노들강변”, 독무 “봄타령”(김인애)이였으며 독창에는 녀고음가수인 주선옥이 부른 “봉선화”, “9.18”, “노들강변”이였으며 바이올린독주에는 정진옥이 연주한 “민요련곡”, “류랑자의 노래”, “도루꼬소야곡”이였고 쌕스폰독주에는 리춘화가 연주한 “양산도”, “금과 은”, 경음악에는 “노들강변”, “라 콤파루시다”, 연극에는 “리홍광”과 1막 2장으로 된 “강제병”이였다.
우리는 “5.1”절부터 1주일간 매일 두차례씩 공연하였는데 번마다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통화시에서 공연이 끝난후 연극조와 창작조는 통화에 남아 창작도 하고 연기력을 제고하기 위한 기본훈련을 하고 가무대는 삼원포, 류하, 오도구, 륙도구, 정가점, 대창오, 유성고, 신림촌, 경기촌, 벽옹촌 등지에 가 공연하였다.
한달남짓이 순회공연을 하던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통화로 빨리 돌아오라는 사령부의 통지를 받았다. 우리는 즉시 통화로 돌아왔다. 이때 마침 통화에서는 관중들의 박수갈채속에서 연극이 진행되고있었는데 연극이 채 끝나기전에 불시에 막이 내렸다. 무대우에서 박권역을 맡아하던 지봉래의 심장병이 발작했던것이다. 이렇게 지봉래는 무대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지대 사령부에서는 추도회를 열었다.
■ 전투에 배합해 선전선동도 함께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장개석은 해방구를 향해 무력침공을 발동하였다. 1946년 3월 31일에는 영구, 본계, 사평을 점령했고 6월에는 장춘, 길림, 매하구 등 송화강이남을 점령한후 통화를 향하여 쳐들어오고있었다. 우리 선전대는 후근부대와 같이 통화에서 철퇴하여 하루에 70~80리씩 강행군하면서도 목적지에 도착하면 군중대회를 열고 공연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약 일주일후에 림강에 도착하였는데 림강방송국의 요청에 의해 많은 종목들을 방송하였다.
선전대가 통화에서 림강을 거쳐 무송현에 도착한 때는 1946년 8월 14일이였다. 우리가 무송에 도착한 며칠후 휘남무장공작대에 있던 유덕수가 우리 선전대에 전근되여왔고 관내에서 리재연(남고음독창가수), 손진옥(녀고음독창가수)과 김형기, 최회련, 장도식 등도 왔다. 그리고 군정대학에서 온 최정연, 김현대 등이 창작조에 배치되여 우리 집단의 창작력량은 강화되였다.
지대 사령부에서는 상급의 지시에 근거하여 전사들에게 첫째로 전투, 정치훈련과 계급교양을 진행할것, 둘째로 일체 반동파를 숙청하고 근거지보위와 지방정부의 건설을 강화할것. 셋째로 생산건설과 군민단결을 강화할것 등 3대 임무를 제출하였다. 선전대에서는 이 임무를 반영한 공연종목준비에 달라붙어 인차 “근거지건설의 노래”(주선우 작사, 정진옥 작곡), “토비숙청가”(최득화 작사, 유덕수 작곡), “3대임무가”(김우수 작사, 유덕수 작곡) 등 군중가요를 창작하여 각종 집회를 리용하여 전사들에게 보급하였다. 이러한 선전고동은 전사들이 3대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적극성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선전대가 무송에 도착한후 사령부에서는 선전대대회를 소집하고 새로운 조직체계와 주요한 책임자명단을 공포하였는데 그들로는 선전대 대장에 김성춘, 지도원에 김형기, 부대장에 리선봉, 음악대 대장에 정진옥, 음악대 정치간사에 리돈화, 무용대 대장에 최회련, 정치간사에 윤광복, 연극대 대장에 김경선, 정치간사에 주선우, 음악창작조성원에 리춘회, 유덕수, 희곡창작조성원에 최정연, 김우수, 최득화, 김현대, 관리원에 장국룡 등이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로는 극작품에 단막극 “부상병”(주선우 작), 단막극 “공작원”(최정연 작), 2막극 “민주련군 오는 날”(김우수, 최정연 합작), 단막극 “인민의 군대”(최득화 작) 등이였고 무용종목에 집체무 “칼춤”(윤광복, 김인애 합작), 가무 “옹정애민”(김인애, 윤광복 합작), 집체무 “근거지건설”, 독무 “승무”(리금덕 작), 쌍무 “꼴망태”(김인애, 최회련 합작), 소가극 “열여덟번째 첩”(관내작품) 등이였으며 군중가요에 “전방바람이 불어오네”(주선우 작사, 유덕수 작곡), “박격포의 노래”(김영진 작사, 서영화 작곡), “수류탄”(서영화 번역, 작곡) 등이였다. 특히 정진옥이 창작한 4악장으로 된 표제음악 “승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 폭파영웅 조성두 대대적으로 선전
지뢰수 조성두용사는 동북해방전투에서 처음으로 견고한 적의 영구화점을 육탄이 되여 폭파시킨 영웅이다. 사령원 왕자인은 조성두용사의 빛나는 업적을 전체 지전원들과 인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하여 밤을 새우면서 조용사에 대한 사적을 산문시형식으로 창작한후 선전대 창작조에 보내면서 “반드시 짧은 기일내에 조용사의 사적을 구가하는 연극과 노래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라”는 긴급전투임무를 내렸다. 이 임무를 접한 전체 선전대원들은 이를 조용사를 따라배우는 실제행동으로 간주하고 드높은 열정으로 자기가 맡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심혈을 몰부었다. 창작조의 최득화는 하루밤새 1막 2장으로 된 연극 “지뢰수 조성두용사”의 집필을 끝내고 평론까지 하였으며 가사를 창작한 다음 작곡하였다.
1947년 3월 7일 저녁, 휘남극장은 사령부 지도자들을 위수로 한 직속기관 및 전투부대와 지방사업인원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먼저 조성두용사를 비롯한 휘남공격전에서 희생된 렬사들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였다. 이어서 휘남전투를 총화한 다음 조성두용사의 사적을 구가하는 공연을 시작하여다.
그후 우리는 매하구에서 잠시 휴정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영예군인들의 업적을 가송하는 단막극 “영예군인”(주선우, 최득화 작), “영예군인의 노래”(집체작, 유덕수 작곡)를 창작하고 공연하여 영예군인들을 지방에 안치시키는 사업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1947년 초가을 선전대의 인원은 120여명으로 되였는데 조직체계와 주요한 책임자의 변동은 아래와 같다.
선전대 대대장에 김성춘, 지도원에 로일혁, 음악대 대장에 정진옥, 음악대 정치간사에 홍기현, 무용대 대장에 김인애, 무용대 정치간사에 윤광복, 연극대 대장에 김경선, 연극대 정치간사에 주선우, 음악창작조에 유덕수, 서영화, 문재동, 박상규, 희곡창작조에 최정연, 최득화, 김우수 등.
당시 창작품 및 공연종목으로는 취주악에 “빨찌산추도가”, “도라지변주곡”, “쏘련행진곡” 제1번, 제2번, 제5번, “승리행진곡”, 남고음독창곡으로 “무너진 포대”(집체 작사, 정진옥 작곡), “웃어라 하하하!”(리재연 작사, 서영화 작곡), 합창곡으로 “연안송”, “승리의 개가”(집체 작사, 정진옥 작곡), “꿩탕의 노래”(집체 작사, 유덕수 작곡), 무용으로 집체무 “지주를 청산하라”, “흥타령”, “전사무”, 가무 “아리랑”, 독무 “양산도”, 단막극 “공작원”(최정연 작), “두개 만두”(최정연 작), 막간극 “3€Y?부녀절”(박상규 작), 표연창 “장로산” 등이 있다.
■ 문예정풍대변론으로 방향 모색
1948년초에 선전대는 사단지휘부와 같이 매하구로부터 남진하여 철령부근에 있는 고산툰에 자리를 잡았다. 고산툰에 도착하자 우리는 모택동동지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학습하면서 문예정풍을 시작하였다. 문예가 누구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방향문제를 두고 우리는 대변론을 진행하여 짧은 시간내에 인식을 통일하였다.
이 시기에 부대에서 “소고복수”운동과 결합하여 사상, 규률, 작풍 등 3가지를 검사하는 활동을 벌렸다. 이와 더불어 부대에서는 전 한단계의 전투성과를 총화하면서 사단 공신대회를 열었다. 공신대회를 앞두고 선전대에서는 드높은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짧은 기간에 큰 성과를 얻었다. “승리의 개가”(집체 작사, 정진옥 작곡), “공신의 노래”(집체 작사, 유덕수 작곡), “3김의 노래”(집체 작사, 서영화 작곡) 등 작품은 이때에 나온것이다. 뒤이어 김인애가 안무한 “법고춤”과 “춘경무”, “양걸춤”, 그리고 김우수가 창작한 연극 “창작원의 하루”, 소가극 “복수의 불길”(서영화, 박상규 작) 등 다채로운 종목들이 륙속 무대에 오를 만단의 준비를 하였다. 공신대회를 하는 날 우리는 영웅들을 위문하는 공연을 하였다.
1948년 10월 15일, 료심전역이 시작되였다. 우리 사단은 상급의 전략적포치에 따라 전례없이 간고한 북상 남하의 강행군을 하고 11월 2일 동북해방전쟁에서 국민당군대의 마지막 보루인 심양을 완전히 해방하였다.
심양을 해방한 아군 주력부대는 평진전역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각개 로선을 통하여 관내로 돌진하였다. 동북국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사단은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명명을 받은후 사령원 오수권동지의 직속부대인 일부 형제부대들과 같이 심양위수임무를 담당하게 되였다. 우리는 동북해방전쟁승리의 크나큰 기쁨속에서 “심양건설의 노래”를 창작하여 전 사단에 보급하였다. 이 노래는 급속히 심양에 있는 조선족군중속에 널리 보급되였다.
■ 대중 상대로 해방전쟁승리 구가
동북해방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된후 당의 사업중점은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 옮겨졌다. 때문에 우리 문공단의 임무는 대부분 농민군중을 위해 창작하고 공연하던데로부터 도시의 로동계급과 인민들에게 알맞은 작품을 창작하는데 모를 박아야 했다. 이때 심양기관차공장 로동자들은 해방의 기쁨을 안고 드높은 열의로 “모택동호”기관차를 제작하여 수도 북경에 보내였는데 중국로동계급의 영웅적기개를 떨쳤다. 우리 문공단은 이 선진사적을 광범히 선전하기 위하여 손진옥과 유덕수를 기관차공장에 보내여 가극(한문대본)을 창작하게 하고 그것을 련습하여 각 공장으로 찾아다니며 공연하였다.
모주석은 1949년에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란 신년사를 발표하였는데 문공단에서는 이 글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고 토론하였다. 창작일군들은 부대생활에 심입한후 3막 4장으로 된 가극 “광영패”를 창작하였다. 음악창작은 정진옥, 김우수가 합작하였는데 민요풍으로 창작하였다. 또 일부 창작일군들은 신년사에서 운용한 희랍우화 “뱀과 농부”를 주제로 한 4막 5장의 대형가무극을 창작하였는데 대본은 주선우와 최정연이 쓰고 작곡은 유덕수가 하였으며 안무는 김인애, 신룡학, 윤광복이 합작하였다.
전체 창작일군들과 배우들의 고심한 노력으로 대형민족가극 “뱀과 농부”는 근 40여명으로 된 관현악반주에 의하여 심양의 여러 극장에서 공연되였다. 그후 가무극 “뱀과 농부”, 무용 “춘경무”, “법고무” 등 작품들은 1949년 7월초순에 북경에서 열린 중국 제1차문학예술일군대표대회의 초청을 받고 북경에서 공연되였는데 각 지방 대표들의 절찬을 받았다. 기록영화촬영소에서는 우리 작품들을 촬영하여 선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럽게 모주석과 주덕총사령, 주총리 등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