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18”사변후 일본침략군은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하면서 허다한 참안을 빚어냈다. 동만지역의 “해란강대참안”은 그 일례이다. 피의 세례를 거쳐 조선족인민들은 무장한 일본침략자를 축출하자면 반드시 총을 들고 무장으로 일본제국주의와 그의 주구들을 족쳐야 한다는것을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부터 조선족인민들은 각지 당조직의 령도아래 항일부대를 건립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동만지역에서는 1931년 12월 중공동만특위가 “명월구회의”를 거행한후 동만 각 현의 당조직들은 군중을 발동하여 별동대, 유격대, 돌격대, 적위대 등을 건립하였다. 이에 토대하여 1932년봄,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항일유격대가 건립되였다. 1933년초, 동만지역 4개 현의 유격대는 도합 360여명에 달하였다. 그중 조선족이 90%이상을 차지하였다.
남만지역에서는 1932년 6월 리홍광이 거느리는 “개잡이대”를 토대로 반석로농반일의용군을 건립하였다. 11월에 반일의용군은 남만유격대로 개편되였다. 후에 조선족청년들을 골간으로 한 해룡유격대와 조선족당원 리민환이 건립한 류하농민자위대도 남만유격대에 가입하였다.
북만지역에서도 녕안, 요하, 밀산, 탕원, 주하 등지의 조선족인민들이 당의 령도하에서 항일유격대를 적극적으로 건립하였다. 1932년 봄부터 1934년 3월까지 선후로 조선족을 골간으로 한 녕안북만로농의용대, 요하민중반일유격대, 주하동북반일유격대, 탕원민중반일유격대, 밀산유격대 등 반일무장대오가 건립되였다.
항일전쟁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동북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은 각지 당조직의 령도아래 1932년 하반년부터 항일유격근거지를 적극적으로 창건하였다. 간고한 투쟁을 거쳐 선후로 동만지역의 연길현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화룡현의 어랑촌, 우복동, 왕청현의 소왕청, 가야하, 요영구, 라자구, 훈춘현의 대황구, 얘퉁라즈, 안도현의 처창즈, 남만지역의 반석동부 버리허토와 서부훙쓰라즈, 북만지역의 녕안현 팔도하자, 주하현의 삼고류, 석두하자, 판팡즈, 흑룡궁, 밀산현의 하다하, 요하현의 포마정자, 따예자구, 탕원현의 탕왕허구, 태평천 등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이런 지방의 대부분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산악지역이다. 근거지에서는 쏘베트정권 혹은 혁명위원회를 설립하고 군중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지원하였다. 동시에 병기공장, 옷공장 등을 건립하여 유격대의 작전을 담보하였다.
1933년 1월 26일, 당중앙은 항일통일전선에 관한 “1.26”지시편지를 하달하였다. 동북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은 이 지시편지정신을 견결히 관철하면서 광범위한 항일민족통일전선구축에 몰입하였다. 근거지내에서는 인민혁명정부로 쏘베트정부를 대체하고 유격대와 기타 반일부대들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일련의 련합작전도 단행하였다. 중공만주성위는 지시편지정신에 근거하여 각지의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혹은 반일동맹군으로 개편하였다. 동만지역의 각현 유격대들도 1934년 3월 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를 편성하고 1935년 5월에 정식으로 군부를 설립하였다.
동북 각지의 상황이 다르기에 각지의 항일유격전쟁의 발전도 불균형하였다. 이를테면 남만지역이나 탕원 등 지방은 일위군의 “토벌”가운데서도 의연히 근거지를 보존하고서 항일유격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동만지역은 적들의 창궐한 진공과 혁명대오내의 착오적인 “반민생단투쟁”으로 하여 력량이 대대적으로 쇠약해지면서 부득불 근거지를 포기하고 전략적전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지만 지구, 지역을 뛰여넘어 더욱 광범위한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하는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였다. 각지의 항일부대지간에 전략적전이를 하고 원정하는 등 서로 련락하고 협동작전하는것이 후에 통일된 동북항일련군의 설립에 견실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