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9.18사변후 동북 각지의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이 제기한 “잃은 땅을 수복하고 견결히 항일하며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중심으로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하자”는 호소에 적극 향응하였다.
1931년 가을 동만지역의 연길현 로투구부근의 관도구, 대기동 등지의 조선족농민 800여명은 중공로투구구위의 령도하에 시위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 ‘3.7’, ‘4.6’감조를 실시하자”는 등 구호를 웨치면서 친일지주의 장원에 몰려가 창고를 열어제끼고 “3.7”, “4.6”의 표준으로 당지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로투구지방당국은 즉시 경찰을 출동시켜 농민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조선족농민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경찰들과 도리를 따지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즉시 연변의 전 지역을 휩쓸었는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의 추수투쟁의 고조를 형성하였다. 투쟁은 4개월 남짓이 계속되였는바 투쟁에 참가한 조선족농민은 무려 1만 5000여명에 달하였다. 투쟁을 통하여 당은 군중가운데서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허다한 지방에서는 감조정책을 실시하여 항일투쟁의 발전을 추진하였다.
1932년 봄, 동만지역의 조선족인민들은 당의 령도아래 춘황투쟁을 벌렸다. 2월초 연길현 의란구 농민군중 1200여명은 먼저 “식량꾸기”, “식량빼앗기”투쟁을 벌렸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친일주구를 타도하자!”, “당지 지주에게서 식량을 꾸어 기황을 넘기자!”는 등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친일주구를 청산하고 지주집 량식창고를 열어 식량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연후에 구룡평에 집결하여 일본경찰분서를 포위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즉시 군경을 대거 출동하여 진압하면서 농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일제에 항거하여 육박전을 하였다. 투쟁은 즉시 동만의 전 지역에 확산되였다. 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농촌지역에서의 세력을 침중하게 타격함으로써 그후의 항일근거지의 건설에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남만지역에서 조선족인민들은 반석을 중심으로 항조, 분량, 일본주구청산 등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봄에 련속 “2.9”, “4.3”, “5.7” 등 대규모 항일, 한간제거 투쟁을 벌렸다. 더우기 5월 7일 하마하자폭동에서 반동, 반북 지구의 조선족군중들은 중공만주성위군위 서기 조선족간부 양림과 조선족당원간부 리동광의 령도하에 4000여명이 시위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친일주구 50여명을 처단함으로써 일제와 한간, 위만정부의 세력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북만지역에서는 녕안, 주하, 탕원, 부원, 요하, 라북 등 현의 조선족인민들은 각종 형식의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탕원의 조선족군중들은 중공탕원중심현위의 령도하에 1832년 음력설을 전후하여 “화장강연대”를 조직하고서 화려한 조선족복장을 떨쳐입고서 각지를 다니면서 군중대회를 소집하였다. 각종 문예공연과 항일선전활동을 통하여 각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반년 남짓한 기간에 항일의 봉화가 송화강하류지역에서 활활 타올라 송화강지역의 항일투쟁을 유력하게 추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