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세기 10년대부터 20년대에 이르기까지
1910~1920년대에 상해, 광동, 북경, 남경, 무한, 천진 등지에는 적지 않은 조선족들이 거주하고있었다. 1916년부터 허다한 조선족청년들은 운남의 강무학교, 한단군사강습소, 북경학병퇀, 락양학병퇀, 락양군관학교, 귀양륙군강무학교, 항주군관학교, 보정군관학교 등 군벌정부의 군사학교에서 학습하였다. 그중 학원이 가장 많은 학교가 바로 황포군관학교였다.
황포군관학교는 손중산이 쏘련의 도음을 받아 중국공산당과 련합하여 창립한 군사정치학교였다. 대혁명시기 황포군관학교에서 학습한 조선족학생은 무려 200여명에 달하였다. 그중 허다한 조선족청년들은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나 지휘관으로 초빙되였다. 당시 조선족청년들은 이 군사학교에서 정치, 군사 지식을 학습한 동시에 국민혁명에 직접 참가하였다. 1924년 10월 광주상단을 평정하는 전투 등에도 참가하였다.
1927년 7월 12일 중공중앙은 남창기의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당시 엽정의 제11군 제24사, 화룡의 제20군, 주사제의 제25군에는 허다한 조선족장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용무쌍하고 지혜로운 조선족청년들의 전투마다 영웅적기개를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뒤이어 1927년 11월 26일 중공광동성위는 또 광주봉기를 결정하고 엽정이 총사령, 엽검영이 부총사령으로, 리용(조선족)이 참모장을 맡았다. 기의전 총지휘부는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족골간들을 기의군의 각 요해부문에 배치하였다. 이를테면 량대보가 광주기의총지휘 엽정의 군사참모로, 김산이 엽정의 군사참모겸 한어번역으로 배치한것이다. 그리고 리용이 제1영영장의 군사고문으로 리빈이 북부전선지휘관으로 최석천, 김규광 등이 특무영과 교도퇀의 련급지휘관으로 임명되였다. 그외에도 대부분 조선족장병들이 기의주력부대의 교도퇀에 편입되였다. 그중 2영5련은 대부분이 조선족장병들로 구성되였다.
1927년 12월 11일 기의군 각부는 공격목표에 총진공을 발동하였다. 박영, 박근만, 박근수 등 조선족으로 구성된 소분대는 적군의 사령부를 야습하였다. 김규광 등 교도퇀 제2영 5련의 조선족전사들은 사하진전투에 참가하였다. 리빈이 거느린 소부대는 적군의 비행장을 습격하여 적기 10여대를 격파하였다.
기의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쏘베트정부를 설립하자 국민당반동파들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제국주의렬강들과 야합하여 기의군에 향하여 발광적인 반격을 감행하였다. 유생력량을 보전하고저 기의군총지휘부는 사하를 건너 해륙풍방향으로 전의하였다. 다른 방면으로는 박영이 거느린 조선족소분대 60여명을 포함한 200여명 도강돌격대는 적군의 겹겹한 포위와 련속되는 공격을 련속 5차나 물리치면서 진지를 고수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박영은 영용하게 희생되고 기타 조선족전사 50여명도 체포되여 모두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광주기의후 량대보, 김산, 오성륜, 박근만, 박근수 등 조선족용사 15명은 교도퇀, 경위퇀 등 부대를 따라 12월 13일 광주를 떠나 16일 화현에 도달하였다. 그후 이 부대들은 중국공농홍군 제4사에 편입되고 19일 해륙풍쏘베트구역에 도달하였다. 1928년 1월 2일 그들은 해륙풍에서 거행한 중국공농홍군제4사 환영대회, 15일에는 조선족용사 15명을 환영하는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해륙풍지역의 인민들과 함께 해륙풍쏘베트정권을 설립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