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八道)는 여덟번째 골짜기에 자리를 잡은 동네라는 뜻. 팔도라면 자연히 천주교를 떠올리게 되고 천주교라면 당연히 팔도를 꼽게 된다.
팔도는 1903년경에 세워진 마을로 연길시에서 서북방향으로 약 25킬로메터 상거한다. 그때 촌민들은 10간 초가를 지어 례배활동장소로 삼았고 8간 초가를 지어 자식들의 배움터로 했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불과 몇년만에 팔도의 교인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팔도 서산기슭의 붉은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아침마다 부근 동네까지 떵떵 울렸다고 한다.
지금도 팔도에 들어설 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것은 역시 팔도 서산기슭에 있는 교회당 건물이다.
기실 고구려성곽도 팔도라는 이 지명 못지 않게 이름이 있었다. 이 성곽은 팔도남쪽에서 약 2.5킬로메터 떨어진 동네에 있는걸로 문헌에 기록되여있다. 옛 성곽이 있다고 해서 토성툰(土城屯)이라고 기록된 이 동네의 원래 이름은 토성(土城)동네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지명도 인젠 까마득한 옛말로 남은듯 했다. 현지에서 이 이름을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알고보니 토성툰이든 토성동네이든 진작 서산촌(西山村) 4촌민소조로 개명이 되여있었다. 알짜배기토박이 촌민이 아니고선 옛 이름을 기억한다는게 진짜 불가사이가 아닐수 없었다.
서산촌의 서쪽으로 200메터 떨어진 곳에는 남북주향의 자그마한 산이 누워있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1킬로메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아홉골짜기에서 흘러나왔다는 뜻의 구수하(九水河)가 천연 해자처럼 북에서 남을 향해 유유히 흐르고있었다. 이 구수하 역시 동네 이름처럼 진작 개명되여 조양하(朝陽河)라고 불리고있었다.
팔도에서 산기슭의 흙길을 따라 반시간 정도 걸었을가 토성동네가 지척에 보였다. 마을 서쪽산에는 오랜 과수나무들이 초병처럼 줄느런히 서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금세 지척에서 울릴듯 했지만 마을에는 아직도 고풍스런 초가들이 적지 않았다. 산기슭의 논밭에 둘러있는 이 마을은 멀리서도 시골 체취가 훈훈하게 풍겨오는것 같았다. 토성동네는 한때 30여 가구가 들어선 큰 조선족동네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불과 20여 가구밖에 남지 않고있었다.
촌민들에 따르면 옛날 동네에서 집 기초나 움을 팔 때면 늘 옛날 기와장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고 한다. 이곳은 옛날에도 선인들이 살던 주거지였던것이다. 2백년의 봉금(封禁)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후 사람들이 용케도 이곳을 찾아 또 삶의 터전으로 잡은데는 저세상 어디선가 선인들이 손짓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룡정현 문물지”에 따르면 이 옛 성곽은 정방형이고 방향이 178˚이며 둘레의 길이는 1,880메터이다. 연변지역의 고대성곽에서 중급류형에 속한다는 얘기이다. 이중 동쪽성벽의 길이는 440메터이며 서쪽성벽의 길이는 420메터, 남쪽성벽의 길이는 500메터, 북쪽성벽의 길이는 520메터이다.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파괴정도가 심하여 진작 원 모습을 잃고있었다.
“찾을 생각일랑 아예 접어두게, 토성은 없어진지 오래다네.” 바자굽 너머 마을사람이 던져오는 말이다.
그들에 따르면 지난 세기 30~40년대까지 마을에는 토성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동네 앞을 지나는 자그마한 길이 바로 남쪽토성의 자리라고 한다. 서쪽성벽 역시 큰길로 변하였고, 동쪽성벽과 북쪽성벽이 그런대로 밑부분이나마 남아있었다. 이런 성벽의 밑너비는 7~10메터, 높이는 1메터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벽자리는 자칫 논 가운데 있는 달구지 길로 오인하기 쉬웠다. 성벽에는 성문을 설치하는게 기본이지만 어디에나 뚜렷한 문자리가 보이지 않아 성문자리를 찾을수 없었다. 논밭가운데 위치한 건물유적지에도 건물흔적 대신 벼그루터기가 잔해처럼 널려있을뿐이였다. 고대성곽은 토성동네라는 지명처럼 먼 옛날의 희미한 기억으로 가물가물 사라지고있었다.
옛날 성내에는 여러 갈래의 성벽이 있었으며 이런 성벽들은 성곽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내에는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으로 놓인 두갈래의 성벽기초가 있으며 이 성벽 기초는 성내 동남쪽에서 서로 사귀면서 성내를 3개의 구역으로 나누고있었다. 성내 동북쪽에도 성내를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놓은 짤막한 성벽기초가 있다. 성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눈 이런 특이한 구조는 발해국의 동경 룡원부로 비정되는 훈춘시 팔련성의 구조와 사뭇 흡사하다.
성내 남북방향의 성벽자리에는 웬 키 넘는 돌무지가 두개 있었다. 논에 있는 돌들을 모아서 쌓은듯한 이런 돌무지는 여태껏 보아온 고대성곽가운데서 유일무이한 흔적이라 여간 흥미롭지 않았다. 돌덩이들은 주먹만큼의 크기거나 팔뚝만한 크기로 모두 제가끔이였다. 혹여나 해서 돌덩이들을 뒤번졌더니 돌무지에서 천년의 신음인듯 연신 툭-탁 소리가 울려나온다. 그러나 돌덩이들만 무수히 쌓여있는 돌무지에는 그 이상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 품었던 실올 같은 희망은 갈수록 사라지고 대신 실망이 돌무지처럼 자꾸 쌓여간다. 어쩌면 천년의 고성도 사라진 성벽처럼 더는 어제 날의 모습을 찾아볼수 없는 걸가…
마을기슭의 논밭 가장자리에 과수나무가 몇그루 있었다. 무심히 지나려 하다가 눈에 얼핏 뜨이는 기와조각에 발목을 잡혔다. 무늬가 있는 이런 기와는 연변지역 고대성곽들을 답사하면서 보아왔던 그런 기와장들이였던것이다. 네모무늬, 그물무늬, 물결무늬 등으로 기와장의 무늬는 무척 다양했고 또 낙엽처럼 흔하게 널려 있었다.
문물지는 또 성내에서 연꽃무늬의 막새기와, 압지무늬의 암키와, 문자기와 그리고 질그릇과 치레거리 등 유물이 출토된걸로 전한다.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연변지역의 고구려와 발해 성터에서 흔하게 볼수 있는것들이다. 토성동네에는 “봉금”후인 100여년전이 아니라 진작 1500년전부터 내처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던것이다. 이중 새머리모양의 치레거리와 밭 전(田)자 무늬의 암키와는 처음으로 발견되였다고 한다. 이런 새로운 기물은 고대성곽의 력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자료로 되고있다.
아무튼 이런 유물들은 토성동네에 있는 고대성곽이 고구려와 발해국 시기에 모두 사용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다만 성곽은 모양이 네모반듯하고 또 성내가 성벽에 의해 여러 구역으로 나뉘는 등 발해성곽의 특점이 보다 두드러질뿐이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토성동네의 성곽을 고구려가 아닌 발해시기의 고성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성벽자리와 유물들, 간간이 보이는 고대성곽의 이런 흔적에는 또 어떤 천년의 “암호문”이 숨어있을가?…
불현듯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시야를 꽉 막는다. 촌민들이 성곽터에서 북데기를 태우는 연기였다. 한순간 천년의 유적은 땅위에 나타난 그 베일속으로 표표히 사라진다. 연기의 장막 저쪽에서 천년의 세월을 헤치고 뭔가 불쑥 나타날듯한 환각이 떠오른다.
“옛날 이 성곽에 고구려장수가 있었다고 하네…”
토성동네에 전해지고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로인들에 따르면 이 장수는 바로 부근 고구려장성을 파수하는 장령이였다는것이다.
이 이야기가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알길 없다. 그러나 허망한 전설인것 같지는 않다는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아닌게 아니라 성곽부근의 산등성이에서 고구려 옛 장성이 룡처럼 꿈틀거리고있기때문이다. 이 고구려장성은 팔도서북쪽을 에돌며 조양하를 지나 동쪽으로 평봉산을 넘고있다. 팔도서북쪽의 산봉우리에는 아직도 망루와 참호 흔적이 있으며 동쪽에 있는 평봉산에는 아직도 장성의 일부가 잔존하고있다.
성곽은 장성 부근의 요새로는 물론이요, 또 교통요로를 지키는 파수군으로 되고있었다. 연길에서 팔도를 지나 북쪽의 삼도만(三道灣) 근처를 경유하여 각기 안도와 왕청 지역으로 통하는 옛길은 바로 토성동네 부근을 지난다. 동네남쪽에 있는 태양(太陽)고성 등 고대성곽유적지는 병목과 다름없는 요충지로서의 이곳의 무게를 가늠할수 있게 한다.
성곽의 위치와 발굴된 유물 등은 장수가 직접 이곳에 진을 치고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설속의 장수는 보이지 않는 장막뒤에 숨어서 기어이 현신을 하지 않고있었다. 대신 하늘과 땅 사이에 자욱한 연기는 마치 먼 옛날 장성봉화대에서 타올랐던 그 무언의 “신호”를 재연하는것 같았다. 아쉽게도 울퉁불퉁한 논길우에 울리는 경운기의 귀청 때리는 소리는 그 희미한 천년의 모습마저 산산이 부셔버리고있었다(김호림/중국국제방송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