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뉴스>>불멸의 발자취>>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
월색만 고요한 황성 옛터 성자산
2009년 07월 15일 11:13 【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약 8㎞ 가노라면 문득 산 하나가 보초병처럼 길을 막아 나선다. 산은 연길 동북쪽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나간 산줄기의 머리 부분에 위치, 흡사 룡두와 같은 형국이다. 이 산은 산성이 있다고 하여 성자산(城子山)이라고 불린다.

버스는 시내 북쪽에서 성자산 서쪽 기슭의 구하동(龟河洞)까지 통하고 있었다. 구하동 북쪽의 산등성이를 타고 곧바로 산성 서북쪽의 성문으로 진입할수 있으며 또 남쪽의 산기슭을 따라 돌아가면 평지에 있는 성문으로 들어갈수 있다고 한다.

구경도 할 겸 산기슭을 따라 빙 산성을 돌아가기로 했다. 산기슭에는 장춘-도문 철도가 지나고 있었고 철길 아래에는 부르하통하가 소리 내며 흐르고 있었다. 산굽이를 돌자 자그마한 동네가 금방 시야에 밟혀왔다. “산성리”라고 쓴 돌비석이 동네어구의 바자굽에 기대여 있었다.

산성리는 19세기 말, 큰 기근에 몰리던 조선 리재민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세운 마을이라고 한다. 도회지와 멀리 떨어진 산성리에는 아직도 2~30세대의 인가가 있었다. 요즘 청정한 시골이 각광을 받으면서 마을에는 오히려 새로 늘어난 기와집들이 적지 않은듯 하였다.

“예? 산성말임둥? 십분쯤 올라가믄 됩꾸마.”

“마을을 벗어나믄 비석이 인차 보일겜둥.”

그늘진 집 모퉁이에서 앉아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던 아줌마들이 열성스레 우리를 안내했다. 함경도 냄새가 다분한 사투리는 고향마을을 찾은 듯한 친근감을 주었다. 그들에 따르면 산성을 찾는 손님들이 자주 있다고 한다.

길가의 풀잎에서 간밤에 질금질금 내린 부슬비가 애잔히 묻어난다. 바지에 달라붙은 엉겅퀴를 뜯다말고 서너 발이나 앞선 일행을 불렀다. 풀숲에 난데없이 둥근 돌이 보였던것이다. 쑥대를 헤집고 보니 연꽃무늬가 돋친 연자방아 돌이였다. 연자방아에 꽃무늬를 새겨 넣을 정도라면 적어도 귀족이나 왕궁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반미터 지름의 이 돌은 무척 무거웠는데 일행 넷이 함께 들어올리기에도 버거웠다. 보아하니 이 유물은 하도 무거운 덕분에 아직 산성리에 그대로 남아있는것 같았다.

뒷이야기이지만 현지 문물부문에서는 이 연자방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여느 연자방아와 비슷한 걸로 오인했는지 모르겠지만 돌이 아니라 역사 자체가 소외 받는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마침 민속박물관을 준비하던 현지의 민간인에 의해 소장되여 그나마 다행이 아닐수 없다.

동네어구를 벗어나자 산자락의 오솔길 옆에 세워진 표지석이 한눈에 안겨왔다. 1961년 길림성에서 성급문화유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세운 표지석이였다. 표지석의 뒤면에는 궁궐테두리의 1천m 이내가 건설통제지대라고 명문으로 밝혀있었다.

표지석의 바로 동남쪽에 토성과 성문터가 있었다. 여기에서 수백미터 더 올라가자 산등성이의 아래에 펑퍼짐한 곳이 나타났다. 두 산마루가 마주 보이는 이 골짜기는 아늑한 분위기가 났다. 수림이 우거진 언덕은 인공적으로 반듯하게 땅을 고른듯 하였다. 수림에는 물론 수림가의 경작지에도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기재에 따르면 이곳에서 끈 무늬와 물결무늬의 기와가 발견되였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는 오랜 기와들이 적지 않은것 같았다. 현지에는 성내에서 주은 기와로 지붕을 얹은 가옥이 있어 재미나는 화젯거리로 되고 있었던것. 일각에서는 이 옛 건물터를 궁궐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만주벌판을 주름잡던 무사도, 긴 소매 너울거리며 춤추던 궁녀도 더는 찾을바 없었다. 색 바랜 기와조각만 외롭게 성자산 산성의 옛 궁궐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중국에서 제일 이른 돈의 하나인 당나라의 개원통보를 비롯, 조선 숙종대왕 때의 송편통보, 송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동전 등 10여종의 동전과 구리거울, 금가락지, 목걸이, 솥, 활촉 등이 나왔다고 한다. 거개가 우연히 밭일을 하면서 발견된 유물들이였다. 동하국의 관청도장과 옥제기물 등 귀중한 유물도 출토되였다고 전한다.

현지에는 지금도 종종 이런 유물이 발견되는걸로 전한다. 감자밭을 일구다가 “보배”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허망한 풍문이 아니였다.

산성이 있는 이 산이 바닷물 위에 엉성한 모습을 드러낸건 지금으로부터 수십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성자산 부근의 소영자에 들짐승을 뒤쫓는 원시인들의 외침소리가 울리고 성자산 산성의 성곽우에 여러 조대의 무사들이 주마등처럼 바뀌였다. 그동안 이 산성터에 묻힌 유물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학계에서는 발굴된 유물로 미뤄 성자산 산성이 고구려시기에 축조되고 발해와 료나라, 금나라시기에 계속 보수, 사용된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산성의 표지석에는 성곽의 축조시기가 발해로 되여있지만 현지에서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학자는 아직도 그리 많지 않은것 같았다.

1215년 10월, 요동지역 선무사(宣抚使) 포선만노(浦鲜万奴)는 료양(辽阳)에서 왕으로 칭하고 국호를 대직(大直)으로 하였다. 얼마후 포선만노는 녀진족의 옛 고장으로 나라를 옮기고 국호를 동하국(东夏国)이라고 한다. 이때 성자산 산성은 료양을 이어 동하국(서기 1215년~서기 1233년)의 두번째 서울 “남경(南京)”으로 봉해진걸로 전한다.

활과 창을 잡은 고대인들에게 험한 산발을 탄 산성은 얼마나 무서운 장벽이였을가?… 그러나 높디높은 성벽도 결국 나라의 패망을 막을수 없었다.

몽골 병사들의 말발굽은 드디어 성자산 산성 아래에도 울렸다. “신원사(新元史)․포선만노”편에 따르면 몽골 병사들은 바로 성문이 있는 동남쪽 그리고 산등성이에 이어진 성곽의 서북쪽에서 협공하였다. 몽골군을 인솔한 대장이 사다리를 타고 성곽에 올라 무사 수십명의 목을 베자 동하국 군사들은 한순간 군심이 흩어지며 몽골군은 이 틈을 타서 산성을 깨뜨리고 포선만노를 포획하여 참수했다고 한다.

고증에 따르면 15세기를 전후하여 여진족 올량하부(兀良合部)가 이 일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애단위(爱丹卫)의 치소가 바로 이 일대에 있었다는것이다. 동하국이 멸망한 후에도 성자산 산성이 계속 사용되였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부분이다.

우리는 가쁜 숨을 톺으며 서쪽 산마루에 올랐다. 정오의 햇볕이 머리 우를 따갑게 비추고 있었다. 멀리 서쪽으로 연길 시내가 한점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벽은 키를 넘는 잡목에 파묻혀 있었는데, 잔존한 성곽은 대개 둔덕 모양이였다. 다행이 길이 서너미터의 성벽이 서쪽에 온전한 모양으로 남아 그제 날의 위용을 간신히 더듬게 하고 있었다. 이 성벽은 30~40년전에 동네 민병들이 전쟁준비용 참호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되였다고 한다. 그때의 참호는 아직도 성벽 부근에 군데군데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전반 성벽은 성자산 산등성이의 지세에 따라 불규칙적인 타원형 모양으로 되였는데, 어마어마한 키와 흡사하였다. 산세를 따라 축성한 이 산성은 그 둘레의 길이가 4454m나 된다.

성자산 북쪽으로 실개천을 사이 두고 움푹한 모양의 산마루가 보였다. 산성리의 노인들은 이 산을 조포수산이라고 불렀다. 옛날 왕이 미역을 감던 늪이 그 산꼭대기에 있다고 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현지 로인들의 입으로 한입두입 전해져 내려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조포수산은 또 “욕지산(浴池山)”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 고구려 태조왕이 동쪽의 책성(柵城)을 시찰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가 순행 도중 욕지산에 미역을 감으러 올라갔었을가. 아니, 혹여 고구려가 아닌 동하국의 국왕이 미역을 감았는지도 모른다. 와중에 학계에서는 또 성자산 산성이 바로 고구려의 “책성”이라는 설도 나와 왈가불가 론쟁이 이어지고 있다.

성자산 남쪽에는 또 강을 사이 두고 성자산 산성과 쌍둥이 성으로 불리는 평지성인 “하룡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하룡고성 역시 성자산 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고성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길분지의 동쪽에 자리 잡은 성자산 산성은 곡창지대를 지키고 있으며 연길에서 도문으로 통하는 부르하통강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서 군사요충지로 각광을 받는다. 성자산 부근의 산마루에서 발견된 망루와 봉화대는 바로 산성의 이런 요새 신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산성의 옛 궁궐은 한시기 력사의 운무를 헤치고 그제 날의 모습을 재현할듯 했다. 연길시의 2010년 도시전망계획서가 성자산 산성의 옛터를 개발할 전망을 내비쳤던것이다. 그런데 “소나기만 울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격”, 산성에는 여태껏 별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멀리 옛 궁궐터의 우거진 수풀 속에서 정오의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옛 궁궐에 울렸던 궁정음악은 바람에 날려갔는지 더는 들리지 않는다. 문득 옛 노래 한마디가 떠올라 공연히 울적한 마음을 긁었다.

“…황성옛터에 봄이 오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속의 서린 회포를 말해주노라.”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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