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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무덤이 있는 마을 소영자(小营子)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상전벽해의 변화속에

2009년 06월 17일 09:15【글자 크게 복원 작게】【메모】【프린트】【창닫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은 알아도 연길동쪽 외곽의 소영자를 아는 외지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소영자라는 지명이 연길보다 훨씬 앞섰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가물에 씨앗나듯하다.

소영자는 옛 지명으로서 지금은 소영촌이라고 불리우는데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7킬로메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나지막한 산기슭을 따라 내처 몇킬로메터 쭉 이어진 촌락은 그대로 띠모양을 이루고있다.

청나라때 봉금(封禁)이 해제되기전에 연길의 벌은 무인지대였다고 한다. 이 벌에 조선반도와 중국내지에서 찾아온 이주민이 보이기 시작한것은 19세기말이였다. 1880년대초, 소영자에는 30여가구의 만족과 조선인이 살았다고 전한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오늘의 소영자동쪽인 계동(溪洞) 기차역의 부근에 군영을 앉혔는데 이 작은 군영으로 해서 얻어진 촌락의 이름이 바로 소영자라고 한다.

연길시내의 동쪽에서 소영자로 포장길을 따라 갈수 있고 산행이 취미라면 산등성이를 가로탄 흙길을 따라 갈수 있다.

■ 천년의 촌락

불과 30년전만 해도 소영자와 연길시내 사이에는 황량한 들이 가로누워있었다. 그래서 밤길을 걷는 사람들은 종종 귀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흠칫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촘촘하게 들어앉은 살림집들은 물론이요, 또 공장건물까지 가세해서 오히려 귀찮도록 분주한 경상이다.

사실 소영자에 인가가 들어선것은 3000년의 긴 세월을 거슬러 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일찍 연길지역에는 예맥족계통의 옥저(沃沮)인들이 주요한 거주자로 있었다. 그들은 소영촌 제10촌민소조의 유적을 포함, 많은 유적들을 연길시 주변에 남기고있다. 그러나 소영자에서 유적지를 찾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동네 어른을 붙잡고 물었더니 대답대신 물음이 날아왔다. “뭐? 고대유적지요? 우리 마을에 그런 게 다 있어요?”

후문이지만 소영자의 토박이는 박씨, 윤씨, 황씨, 장씨 등 성씨의 가족이였다. 아쉽게도 토박이 로인들은 대부분 세상을 뜨고 후대들도 거의 모두 본고장을 떠나고 없었다. 동네 좌상이라고 할수 있는 60대의 사람들은 거개 소영자의 유래마저 잘 모르고있었다.

소영촌 제10촌민소조 북쪽 골짜기에 있는 유적에서 약간의 토기조각과 오석조각이 발견되였는데 유물이 너무 적어 학자들도 내용물을 뭐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한다. 다만 모래가 섞인 갈색토기와 흑요석기의 조각으로 미루어 선사시대의 유적지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유적지가 과수밭서쪽에 있다는 기재에 따라 부근 산등성이를 한겻이나 오르내렸다. 무성한 잡초더미에서 이따금 이름 모를 새들이 후드득 날아올랐다. 워낙 유물이 적은 이 유적지는 아예 흔적도 찾을수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동명왕 10년(기원 28년) 고구려는 북옥저를 토벌했으며 연길에서 약 킬로메터 떨어진 훈춘경내에 책성을 두었다. 고구려는 또 연길지역에 성자산산성, 하룡고성, 흥안고성 등을 세운다. 1963년, 성자산 서쪽기슭에 있는 소영자에서 출토된 고구려시기의 쇠솥 등 유물은 이 시기 고구려의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그러나 정작 연변에서 고구려시기의 유물은 발견된게 아주 적다.

고구려의 뒤를 이어 연변지역은 발해국의 중심지역이였다. 연길시 지역에서 발견된 발해시기의 유적지만 해도 10여곳 된다. 이중에는 소영자의 유적지도 들어있다. “연길시문물지”에 따르면 소영자의 발해유적지는 소영촌 제1촌민소조의 서북쪽 산비탈에 있다. 지금은 과수밭에 흔적 없이 묻혀있는 이곳은 성자산산성과 불과 몇백메터 상거, 지세와 유물 특히 토기의 밑굽기물모양이 발해기물의 특점을 갖춘것으로 미루어 발해시기의 촌락유적지로 추정되고있다.

천년의 촌락은 그대로 일장 연대기를 적고있었다.

■ 천년전의 석관묘(石棺墓)

소영자의 석관묘는 일본인 후시다 료우사꾸(藤田亮策)가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1938년에 발굴을 주관, 1943년에 발표한 “연길 소영자유적조사보고”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로부터 소영자는 천년전의 석관묘로 하여 고고학계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유명한 이 석관묘를 알고있는 현지인들은 전무하다싶이 했다. 석관묘 부근의 동네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진씨 할머니(80여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듣는 얘기이네. 그게 어디에 있었나?”

다행이 유별난 기억때문에 석관묘유적지를 기억하고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릴 때 소영자소학교를 다녔다는 장희명(80여세)옹에 따르면 석관묘는 바로 현 소영촌 제7촌민소조북쪽에 있는 바위벼랑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그무렵 장대종이라고 불리는 장씨가문의 선인산소 역시 이곳에 모셔져있었는데 고분발굴시 일본인들이 그가 조선시대의 유지인사라고 존중해서 따로 이장했기때문에 지금까지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다는것이다. 그후 일본군이 이 바위벼랑아래에 비행기 격납고를 세우면서 원래의 지모(地貌)는 형체 없이 파괴된다. 고분을 발굴하고 또 격납고를 만들면서 새로 벼랑기슭에 생겼던 버럭둔덕도 20여년전 소영자남쪽의 대로를 닦으면서 말끔히 소실되였다. 이로써 고분의 흔적은 아예 언제 있었던가싶게 깡그리 사라진것이다.

일부는 또 고분이 제4촌민소조의 뒤산 언덕에 있었다고 각설한다. 아닌게 아니라 여기에도 수십메터 지름의 큰 구덩이가 있어서 그 설에 어딘가 신빙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발굴 당시의 사진으로 미뤄보면 이 자리라고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우세한다.

기재에 따르면 소영자의 석관묘는 특이한 구조형식으로 유명한데, 길림 중부지역의 돌널무덤과는 달리 2~3기의 석관묘가 돌널의 단벽 또는 장벽, 심지어는 개석이나 저석(底石)을 공유하고있는것들이 존재하고있다. 이외 다수의 무덤 상부에서 0.5~1.0메터의 봉석토(封石土)가 발견되였다는 점 역시 길림 중부지역의 문화와 차별된다.

석관묘의 구역은 동서 25메터, 남북 8메터의 면적내에 있으며 52기의 무덤이 집중되여있었다고 전한다. 일본학자 미가미 쯔기오(三上次男)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석관묘는 2기, 5기, 18기 등 각이한 조합이며 9개 조로 나뉜다. 이런 석관묘는 인위적으로 군체를 이룬것으로 판정되고있다. 남녀합장과 남녀아동합장의 현상이 나타났기때문에 또 부계씨족사회에 들어갔으며 가정이 이미 싹 트기 시작했다는것을 보여준다.

석관묘에서 골제(骨制)의 검, 촉과 타제의 석창, 무경석촉(無莖石钃)이 나온다. 수렵도구의 종류가 많고 형식이 많으며 수량이 많고 제작이 정교한것은 수렵경제가 발달한 측면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이런 유물에 따라 두만강류역에는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석관묘문화인들이 이 단계의 생활을 영위했다고 주장한다. 석관묘에서는 또 마제석기, 슴베가 긴 버들잎형 또는 슴베 없는 납작 석촉, 석도 등 마제석기, 홍도(紅陶), 돌도끼 등이 출토된다. 이런 문화형태는 내몽골지역의 적봉(赤峰) 홍산(紅山)문화의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 등과 상통한다. 이미 청동기시대에 들어선것이다. 학자들은 적봉지역의 청동기문화인이 이때 동쪽으로 옮겨와서 무덤을 축조했다고 본다.

발굴된 유물들은 재료에 석재와 뼈가 많았으며 적지 않은 흑요석이 있었다. 수량적으로는 수렵도구가 많았고 형식에서는 갓모양의 석기와 갈고리모양의 옥, 인면의 뼈비녀 등이 있었는데 모두 특이한 풍격을 형성했다. 이런 기물은 송화강류역 중상류거나 목단강류역의 문화에 비해 모두 다른것으로 평가된다.

소영자 석관묘의 유물은 골기가 고도로 성숙되고 흑요석기가 유행된게 특점이라고 할수 있다. 중원지대의 상(商), 주(周) 시대에 상당한 소영자의 유적은 석관묘와 출토된 수장기물 등으로 두만강류역의 원시문화에서 대표성을 띤다.

■ 황산에 서린 천년의 한

소영자의 북산은 100여년전만 해도 수림이 빼곡히 들어서있었다. 수십년전만 해도 꿩의 울음소리가 종종 노래처럼 들렸고 당나귀만한 늑대가 드문드문 동네에 내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인적이라곤 드물었던 몇천년전에는 원시인들의 수렵지로 손색이 없었을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소영자의 서쪽에 비행장을 닦던 그무렵부터 말짱 민둥산으로 변해버렸단다.

지금은 소영자에도 1년이 십년 아니 100년 맞잡이로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농경지를 잃은 천년의 촌락은 어느새 콩크리트의 수림에 잠기고있었으며 천년의 석관묘무덤자리 역시 황산의 잡초처럼 소리없이 사라져있었다. 천년의 이 현장은 한세기도 안되는 동안 력사의 뒤안길로 급급히 원래의 모습을 숨기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왜서 유적에 비석 등 표식을 하지 않았는지 의아쩍었다. 사실 문물보호차원은 물론이요, 마을의 홍보와 관광개발의 차원에서도 전혀 무시할수 없는 일이였다.

“글쎄요, 그건 우에서 할 일이 아닐가요?”동네 사람들의 아리숭한 대답이다.

그러든 말든 무명의 산기슭에 고적하게 누운 소영자는 싸늘한 가을바람과 더불어 차창뒤로 점점 멀어지고있었다(김호림).

래원: 연변일보 (편집: 김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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