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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민족통일전선에 관한 중공중앙의 "1.26"지시가 하달된후 연변지구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와 기타 반일부대는 광범위한 무장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여러차례 련합작전을 펼침으로써 연변지구의 항일유격전쟁이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유격대와 기타 반일부대와의 련합작전에서 규모가 제일 큰것은 왕청유격대와 기타 반일부대가 련합으로 싸운 동녕현전투였다.
당시의 동녕현성은 동녕현 3차구진에 위치, 동으로는 중쏘변경과 가까운 변경의 작은 진이였다. 당시 3차구에는 일본괴뢰군 2000명이 주둔해있었고 그중 일본군은 500명이였다. 이외에도 괴뢰경찰과 괴뢰자위단이 적지 않았다. 적들은 대포와 장갑차 등 현대화무기를 갖고있었고 주위는 견고한 방어공사를 구축하였기에 공략하기 어렵고 수위하기 쉬운 곳이였다.
1933년 9월 상순, 중공동만특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는 구국군과 련합하여 동녕현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김일성이 인솔하는 왕청유격대와 항일구국군 시세영, 사충항부 및 반일부대 "금산"부 등 1500여명은 제시간에 집결지점에 도착하였다. 훈춘유격대는 제때에 통지를 받지 못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9월 6일 저녁 9시, 왕청유격대는 방어공사가 제일 견고하고 경비가 제일 삼엄한 서산또치카를 세면으로 포위하고 적의 포대를 향해 맹렬한 화력을 퍼부었으나 적들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유격대는 우회적인 전술로 적의 화력을 분산시킨후 돌파구를 찾아 다시 맹렬한 공격을 하여 끝내 적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유격대는 인차 방향을 바꾸어 서대문으로 쳐들어가 남문과 동문으로 돌입한 구국군과 회합,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이번 전투에서 120명의 일본괴뢰군이 죽거나 상했으며 항일군측은 52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번 전투는 항일부대에서의 유격대의 위신을 대대적으로 높였으며 특히 유격대가 총탄우속을 헤치고 사충항을 구한 사실은 구국군장병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동녕현전투후 유격대와 각 반일부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 래원: 연변일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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