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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역의 항일투쟁은 1932년 하반기 항일유격근거지 건립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각 현, 항일유격대는 당조직의 령도하에 부단히 일떠나 적들의 거점을 습격하고 이동하는 부대와 매복전을 치르는 등 적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1932년 시기는 당중앙에서 아직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제정하기 전인데 연변지역 유격대는 이미 항일구국군 등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일련의 전투를 치르고 승리를 거두고있은 상황이였다. 훈춘현전투도 바로 그중의 하나다.
1932년 4월, 중공훈춘현위는 주운광, 백전태, 오빈, 윤석원, 량혜민 등을 파견해 훈춘에 주둔해있던 항일구국군에 항일선전사업을 하게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밀강에 있던 길림성방군제20려 6,7,8퇀 제2영과 춘화에 있던 왕옥진의 제3영은 선후하여 항일의 기발을 들고 구국군을 창립, 왕덕림구국군의 제5려에 편입됐다.
중공훈춘현위는 또 구국군과 단결, 련합해 항일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는바 1932년 9월 즉 “918”사변 1돐을 계기로 마적달에서 3000여명이 참가한 “병민현합대회”를 개최, 백여명의 구국군관병들이 참가하고 현위서기 서광이 몸소대회를 주최, 강연까지 했으며 군중대표와 구국군대표들도 련이어 무대에 올라 열연을 펼쳤다. 대회후 항일군중들은 근거지로부터 가지고 온 위문품들을 구국군에 전달하였는데 이는 구국군관병들의 뜨거운 눈물을 자아냈으며 항일을 끝까지 하려는 관병들의 의지를 더욱 굳게 했다. 훈춘항일유격대는 늘 구국군과 련합하여 적극 유격전을 펼쳤다.
1932년 10월 훈춘유격대 100여명과 항일구국군 300여명은 련합하여 훈춘현소재지를 격파하였다. 유격대는 싸움을 시작하기전에 여러 경로의 정찰을 거쳐 일본군경비대의 대부분 병력은 북대영에 주둔해있으며 군사령부내의 아주 적은 병력만 현소재지에 배치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다. 싸움은 밤중부터 시작됐다.
먼저 일부분 유격대가 일본군사령부을 향해 전술적공격을 시작하고 다른 일부분 유격대는 구국군과 배합하여 적사령부남측에 있는 위보위단을 진공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사령부내 적들은 황망히 문어구에 있는 보루에 기여들어갔고, 위보위단 적들은 일본군사령부쪽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있는 동안 유격대와 위국군은 기회를 타 위보위단을 포위,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 전투로 우리군은 30여명의 적들을 격사시키고 보총 24자루를 로획했다.
날이 밝아서야 북대영의 일본수비대가 총망히 도착했지만 유격대와 구국군은 이미 그림자도 없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들은 본영으로 돌아가 전투의 승리를 경축하고있었다…
| 래원: 연변일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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