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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짜리로씨야침략군이 동북을 침략할 당시 중국 지방정부는 무능하고 연약했다. 흉악무도한 짜리로씨야침략군은 백성들을 도탄속에 허덕이게 했다. 이에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은 분분이 일떠나 의용군을 조직하고 침략자와 용감한 투쟁을 벌렸다. 의용군에 이어 동북대지에서 침략군에 침중한 타격을 가한 "충의군"이 있었으니 바로 연변 훈춘에서 제일 처음으로 봉기를 일으킨 항로(抗俄)의용군이다.
로씨야군과 싸우던 류영화가 청나라군대의 패배로 몇 사람을 거느리고 태평동에 이르렀다. 류영화를 만난 난민들은 분분히 자신들의 생명을 보호해줄것을 부탁했다. 류영화는 인차 200여명 되는 대오를 조직하고 "충의군"으로 칭한 뒤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로씨야군대에 맞써 저항과 반격을 가했으며 "로씨야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빼앗긴 국토를 되찾자"는 전투구호를 제시했다.
1895년 갑오전쟁전에 참가했던 류영화는 사냥군출신으로서 당시 나이는 50살 남짓하고 록림호걸로 이름났다. 갑오전쟁이 폭발한 뒤 방어군에 참가하여 영장직을 맡고 훈춘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로씨야침략군과 맞서 싸웠다. 충의군이 봉기를 일으킨 뒤 류영화는 부대를 거느리고 로씨야군과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는 한편 연길, 돈화, 길림의 마반산을 경과하는 도중에 흩어진 청군과 지방 자체조직을 대오에 받아들였는데 그 수가 몇천명에 달하고 기병만 천여명에 달했다. 청나라조정은 류영화의 세력이 커지는것을 꺼려 의용군을 핍박하여 무기를 바치고 투항할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류영화는 이에 굴하지 않고 로씨야침략군과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후 류영화의 충의군은 기타 의용군이 련합되였으나 의연히 충의군으로 칭하고 40개 영의 2만여명의 병력으로 확충되여 위세를 크게 떨쳤으며 길림, 료녕동부 산간지대를 전전하면서 1902년말까지 투쟁을 견지했다.
훈춘 태평동에서 시작된 충의군의 항로투쟁은 중국인민이 의화단의 투쟁에 이어 진행한 규모가 비교적 큰 반제애국정의투쟁이며 중국근대인민혁명투쟁사에 길이 빛날 장을 남겨주었다.
| 래원: 연변일보 | (편집: 김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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