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도시 연길의 노란자위 서시장뒤에 진을 치고앉은 연변동화한복회사, 이 회사의 경영인은 이제 금방 30대에 들어선 대학생부부 김설매사장과 그의 남편 리호석이다.
직업선택 “첫 단추” 잘 달다
2002년, 김설매가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만 하여도 꿈이 많고 포부도 컸다. 소학교에 입학하여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생간부로 활약하면서 열심히 자질을 닦고 재질을 꽃피웠다. 하기에 타학생들은 직업에 대하여 고민하였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도전성이 강한 그였고 “세상은 넓고 할일도 많을것인바 주로 자기에게 달렸다”고 확신하는 그였기에 인생의 첫 단추를 잘 끼여야 하는것처럼 직업선택에서 첫 일터 선택이 몹시 중요함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사회조사도 많이 하고 현지고찰도 많이 하였다. 교수님들한테 자문을 청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널리 접촉하면서 선을 길게 늘였다. 서뿔리 달려든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 적성에 맞으면서도 자기 특장을 잘 살릴수 있고 일하면서도 신바람이 나는 그런 하기싶은 일을 하기 위한데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심사숙고한 끝에 자기가 대학시절에 전공한 생물화학공업에 맞춰 중국의 유명한 비단의 고향 사천성 남충시의 이거얼방직공장을 찾아 염색공으로 취직하였다. 이 당시 대학교에서 련애하고 원앙부부연을 맺은 남편 리호석도 대학교에서 배운 대외무역경영학과에 맞춰 대외비단무역을 하면서 사천지역에 터를 잡았다.
김설매녀성은 염색을 배우면서 종래로 이것이 밥벌이를 하는 림시일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낯설고 물선 고장이고 풍속과 습관이 맞지 않지만 회사가 자기 회사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배웠다. 미래를 위한 산지식축적이였던것이다. 남편 리호석도 비단의 원단수출과 무역에 일심하였다. 이 방직회사는 실크원단을 주로 생산수출하는 실크회사로서 전국적으로 앞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굴지의 기업이였다. 그는 한국시장을 개척하여 기업의 실크수출에서 한몫을 담당하였다.
직업도 자기절로 만들었다
“실크 같은 비단원자재를 수출하는것이면 우리들이 가공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자요”. 어느날 김설매가 남편한테 제의하였다. 여러해 염색에 몰두하면서 이미 기본기술을 장악한 그였다. 남편도 무역에서 일정한 기반을 닦았다. 비단은 중국의것이 품질이 최고였지만 염색을 하는것은 한국보다 못하였다. 그래서 원자재를 한국에 보내서 재가공한후 다시 옷이나 기타 완제품을 만들어 다시 중국에 수입하는 형태로 무역을 하였는데 여기서 새로운 착상이 생긴것이다. 새도 날개가 굳어지면 혼자서 난다고 인젠 이들도 창업의 날개를 한껏 펼칠수 있는 시기가 성숙된것이다. 이를 감안한 이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창업에 달라붙었다. 누가 밥통을 만들어주고 직업을 가져다줄 때를 기다릴것이 아니라 자기절로 회사를 만들면서 창업하려는것이였다.
김설매, 리호석부부는 먼저 면밀하게 따져본후 자기에게 알맞는 청사진을 짰다. 기본목표는 한복복장기업을 창설한다는데 취지를 두고 한국의 기술인입, 합작개발, 자주발전이라는 3단계 전략을 제정하였다. 먼저 누을 자리를 보구 다리를 펴라고 자기들의 현상황에 근거하여 크게 접어든것이 아니라 한국의 한복기술을 인입하고 소화하고 흡수하는데 모를 박았다. 원단을 수출하고 완제품을 다시 인입하는 과정에 백방으로 한복기술을 배웠다. 여러 동료회사들이나 무역파트너들과 거래하면서 같지 않은 풍격, 같지 않은 기술을 접촉하였다. 이러면서 점차 자기 특점을 모색한것이다. 일정한 토대를 닦자 이들은 2005년말부터 한국의 합작파트너들과의 련합개발을 시작하였다. 한국 서울의 종로구에 가공을 겸한 준실크한복회사를 세우고 매장도 앉혔다.
고객들은 항상 실크한복을 선호하였다. 실크는 비단제품을 의미하는바 “누에가 실을 토하면서 죽는 순간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뽑아내는” 그 풍격이 비단을 선호하게 되는 계기로도 된다고 한다. 하기에 실크한복을 입으면 재물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재산도 눈덩이 구을듯이 불어난다는 그런 관념에서 시장에서 고객들은 항상 실크한복을 찾는단다.
김설매사장은 실크도 그 종류와 질을 첫자리에 놓고 추구하였다. 이들이 내놓고 고객이 선택하게 하는 비단도 가지수가 각각, 색상도 각각 종류가 감탄할 정도로 많았다. 이를테면 실크원단(비단)으로 말하면 쑥명주 80가지, 넝쿨명주 72가지, 화운단 72가지, 갈포옥사 60가지, 수직명주 69가지, 홍두깨명주(방망이로 두드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60가지, 양모단(남성한복실크) 48가지이다. 이외에도 라심원단, 운학단, 아시원단 등이 6~7가지, 양단, 매화단 등이 4~5가지로서 이런 비단으로 한복을 만드는 동시에 심양, 단동, 소흥 등지에 사무소를 앉히고 완제품과 비단무역판로를 늘이였다. 한국은 물론이고 조선, 로씨야에 수출을 하고있다.
항상 더 높은 경지에로
김설매사장은 비록 “삼십이립”이라고 삼십대에 갓 들어선 상태에서 홀로 서기를 하였지만 여기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해당 통계에 따르면 연길시내안에만 하여도 한복가공을 주로 하는 회사가 3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하기에 경쟁도 더없이 치렬하다. 하지만 김설매사장은 동업종의 라이벌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하면서 시장을 점령하고 이를 지켜가면서 항상 도전하는것이 그의 적성에 맞았다.
“질로 승부하고 자기 특점으로 승부하자”. 김설매사장은 이렇게 작심하고 자기만의 제품을 내놓기에 고심하였다. 그는 양복재단과 한복재단을 결부시켜 자기나름의 특색한복을 고안하였다. 월급으로 거금을 지불하면서 한국에서 디자이너를 청하여 전문설계를 하고 한국에 매장을 세개로 확대하고 판매하는 동시에 시장흐름과 고객들의 취향을 파악하였다. 특히 남성한복이 단조롭고 단일하고 구식인데 대비하여 새로운 남성한복양식을 네가지나 창안하였다. 이처럼 근 1년 반 남짓이 고심참담한 노력을 경주하여 자기의 브랜드인 “동화한복”계렬제품과 “퓨전한복”계렬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제품도 다양화를 추구하여 전통한복외에도 개량한복, 한복웨딩드레스도 생산하고있다. 그리고 결혼용소품도 생산하고있는데 이를테면 함보, 돈보, 이불보 등은 모두 한국에서 인입한 고급원단자재로 만드는것이다. 동시에 소비자들의 감당능력을 고려하여 결혼용품, 애기들의 돌생일용품 등도 진렬하여 세를 준다고 한다.
“이달안으로 우리 회사가 한국에 동화계렬한복 200조를 보내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고있습니다”. 김설매사장은 이렇게 피로하면서 하지만 국내의 각지에서 주문해오는 한복도 모두 한국에 수출하는 표준으로 생산하고있다고 뒤를 달았다. 안감 등 주요한 바느질은 수공으로 한단다. 특히 한복은 품을 잡아주는 옷깃이 관건인데 여기서는 한치 오차도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였다.
나젊은 대학생부부의 창업은 간고하고도 고해가 많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풍만하고 그 뒤맛은 달콤하였다. “자기절로 창업하고 자기절로 그 달콤함과 쓴맛을 모두 맛보니 더욱 그러하였다”고 김설매사장은 말한다(글 사진 장경률 허연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