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정의 룡가에 자리잡은 고향집에 가면 제일 먼저 안겨오는것이 벽의 한복판에 걸려진 사진인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온 얼굴에 환히 웃음을 머금은 부모님, 그 뒤에 나와 안해 그리고 녀동생까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그것이 아마 부모님에게 있어서 만년에 가장 소중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어느 가정에나 다 가족사진이 있겠지만 내 기억에는 우리 가정이 가족사진을 찍은것은 오직 세번, 그 사진들에는 흘러간 세월의 희로애락이 다분히 담겨져있다.
첫번째 가족사진은 내가 소학 1학년때였으니 지난 세기 1982년, 그러니까 호도거리가 시작될쯤이였을것이다.차례진 경작지는 모두 한전이였지만 아버지는 강과 가까운 한전에 논을 풀고 해란강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했다.가을이 되자 대대탈곡장에는 아버지가 수확한 벼낟가리가 작은 산처럼 쌓여져있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낮이면 탈곡장에서 숨박꼭질에 여념이 없었고 밤이면 당시 처음 나온 향항무술영화 《곽원갑》을 보러 마을에 유일하게 텔레비죤이 있는 독보조활동실로 무리쳐갔다.
한전에 심은 콩과 옥수수 거기다 벼농사까지 잘되여 목돈을 쥐게 되자 아버지는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텔레비죤을 사기로 했다.
이듬해 6.1절은 잊을수 없다. 그날 우리는 동네에서 처음으로 17인치짜리 《홍매표》 흑백텔레비죤을 샀고 공원유람까지 했다.랭면관에서 랭면을 먹다가 어머니가 가족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하신것 같다. 어쩌다 시내로 나왔는데 기념사진을 남기자는것이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아버지 옆에 서고 녀동생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엄마 무릎에 앉았다.아버지는 중산복에 군대모자를 썼고 어머니는 파마머리에 꽃적삼을 입었다. 물론 오후에 백화점에서 텔레비죤을 들어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몇해가 지나자 사람들의 상품경제의식은 몰라보게 변해갔다.도회지가 가까운 우세를 빌어 남새밭에 비닐하우스를 꾸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우리 집도 남새밭에 운동장만한 비닐하우스를 2개나 만들었다. 먼저 겨우내 온실에서 오이,도마도 모를 키운 후 3월말에 가서 다시 비닐하우스에 옮겨심는다. 5.1절쯤이면 벌써 아기팔뚝만한 오이가 달리기 시작한다. 도마도는 좀 늦지만 역시 5월 하순이면 나오기 시작한다. 비철의 남새라 수입이 짭짤했다. 하지만 남새농들의 돈벌이는 결코 쉬운것이 아니였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시시각각 따라다녔다. 큰바람이 불거나 큰눈이 내리는 날에는 온종일 손에 땀을 쥔채 전투태세를 갖춰야 했다.
몇년동안 고생한 보람으로 우리는 120평방메터짜리 기와집을 지었는데 그해가 내가 초중에 붙는 1988년도였다.그해 초가을 마을에 이동사진사가 왔다. 동네 많은 집들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바람이 불었다. 드레스도 없이 소수레에 앉아 시집왔다는 어머니,집이 없어 남의 세방에서 세간살이을 시작했다는 아버지, 그들은 결혼사진 한장 변변히 찍지 못했던것이다. 채색렌즈앞에서 화장을 곱게 한 어머니는 하얀드레스를 입고 아버지는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받쳐입고 결혼사진을 다시 찍었다. 우리 네식구 가족사진도 함께 찍은것은 물론이다(웃사진).
그후로 몇년 지나 비닐하우스는 예전보다 경기가 못했다. 시장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함께 남방의 값눅은 남새가 대거 들어왔던것이다. 부모님들은 상론끝에 짠지장사를 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당시 우리 마을엔 아마 전 주적으로도 처음 도라지가공공장이 꾸려졌을것이다. 그 도라지반찬을 여기저기 상점들에 다니며 소매하는것이다.
아버지가 이 일에 나섰다. 그런데 초기엔 좀 버는것 같더니 그것도 한시기였다. 도라지가공공장이 여기저기에 서면서 판로도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장사군감이 아니라며 두 손 털고 나앉았다.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한국으로 출국하자 부모님들도 한국행을 고려하게 되였고 때론 다툼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한국행을 단념하였다. 그것은 공부를 잘하는 나와 동생을 념려해서 나와 동생이 대학갈 때까지는 한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들은 고향에서 억세게 일하셨다. 아버지는 남들이 부치지 않는 밭을 더 부쳤으며 농한기에는 삼륜차를 몰아 수입을 늘렸다. 어머니는 짠지 가공과 장사를 했으며 돼지도 6마리나 길렀다. 그래서 번 돈은 일전 한푼 헛되이 쓰지 않고 저금해두었다가 우리 남매의 대학비용으로 쓰군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부모님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했으며 부모님들의 신근한 노력으로 지장없이 대학공부를 할수 있었다. 현재는 모두 졸업하여 나는 교육사업에, 동생은 해외류학에서 각각 성공의 길을 걷고있다.
결혼을 앞두고 나의 건의에 의해 우리는 세번째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시가지의 제일 훌륭한 사진관을 찾아 제일 비싼 사진으로 주문하였다. 화장은 사진관에서 전문화장사들이 해주었고 복장은 마음드는걸로 마음대로 골라입을수 있었다. 우리는 부동한 배경에 맞춰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며 실컷 사진을 찍었다. 비록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모님들은 잔주름이 늘었지만 환히 짓는 웃음에 나이는 젊어만 간다.
그 세번째 사진이 곧바로 부모님댁에 정중하게 걸려져있다. 자식들이 이젠 시내에 들어와 살라고 열백번 권고하지만 부모님들은 지금은 기계화농사여서 농사일도 이제는 살맛 난다면서 싫다고 한다. 더우기 나라에서 3농에 대한 중시가 대단하여 앞으로는 땅값이 금값이 될거라며 부자꿈을 버리지 않는다. 지금은 부자가 아니지만 마음부자로 사는 부모님, 이제 부자의 꿈을 꾸며 네번째, 다섯번째 가족사진을 찍어보고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