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빈주시 추평현 호생진 교가촌 농민 류종수와 산동성 덕주시 평원현 왕봉루진 수무촌 농민 양춘령은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일기쓰기를 견지하였는데 백여권에 달하는 일기책들에는 개혁개방 30년래 이들의 신변에서 발생한 사사건건들이 평민의 시각으로 상세히 기록되여있다. 이런 사사건건은 어쩌면 사소한일이라 할수도 있지만 다른 한 측면으로 놓고 볼 때에는 중국 농촌면모의 변화와 시대의 변천에 대한 기록이 아닐수 없다.
농촌의 발전은 중국의 사회진보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농민들은 기억은 향토의 중국이 현대중국으로 나아가고있는데 대한 진실한 “기록”이다. 10월 9일에 소집된 당의 17기 3차전원회는 농촌개혁발전이 새로운 시기에 들어섰음을 표징하는바 개혁개방 30돐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우리들은 두 농민의 일기에서 지난 30년을 회고하고 사고하고 총화함으로써 공동히 아름다운 래일을 전망하자.
1981: 토지분배를 끝내고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기쁘게 술마셨다
【배경】1978년에 11기 3차전원회의가 열렸다. 그후 가정별도급책임제가 확립되여 개인이 들인 노력과 수입이 직결되였으며 농민들의 생산적극성이 크게 늘어났다.
【류종수일기】4월 21일(1981년), 아침식사를 한후 대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하여 “농촌경제정책문제에 관한 일부 의견”이란 중공중앙 13호문건을 학습하고 오후에 토론을 가졌다.
10월 23일(1981년), 2대에 가서 토지를 나누었다. 오후 4시까지 그 많은 토지를 다 나누었다. 그러나 자류지와 사료지만은 나누지 않았다. 이날 저녁 본 조의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앉아 기쁘게 술을 마셨다.
【기자수기】류종수의 집에 가서야 로인이 지난해 말에 타계한것을 알게 되였다. 류지고는 아버지의 일기책을 꺼내놓았는데 어떤 책은 이미 누렇게 색이 바래져있었다. 그러나 끈으로 꿰맨 일기책은 아주 깨끗했고 표지에는 로인의 필명인 “윤촌”이란 글이 적혀있었다. 류지고는 가장 오랜 일기 한편을 찾아보였다. 시간은 1963년 1월 1일이였다. “44년간 아버지는 소박한 문자로 근 반세기의 농촌, 농민의 거대한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토지도급시에 아버지는 대대회계였는데 매일 밭을 재고 등록하고 표를 그리였습니다. 촌의 토지분배는 아주 순조로왔는데 밭머리에서나 과수원에서나 할것없이 도처에서 농민들이 분망히 보내는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류지고는 계속 말했다. “기쁜 나머지 아버지는 ‘과원서’라는 시 한수를 지었답니다. ‘시내물을 마주하여 북쪽에는 비옥한 밭이요, 사방에 둘러진 나무들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네. 저 울창한 나무들을 바라보소 우리 마을 과수원 밭이라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열매 맺고, 겨울에는 눈꽃이 가지에 활짝 피는, 일년 사계절 그림처럼 아름다와 도화원도 울고 간다오. 마음이 즐겁고 오래오래 살수 있어 목청껏 노래 부르네 우리 세대 연분 있어 신선같은 생활 누린다오.”
1990: 닭을 치고싶어 52원 주고 병아리 100마리를 샀다
【배경】20세기 90년대초, 중앙에서는 농민들이 도시에 들어가 일하는것에 대한 제한을 줄였는데 무수한 농민들이 외출하여 여러가지 치부의 길을 찾아나섰다.
【양춘령일기】1990년 5월 26일, 아침에 병아리를 파는 장사군의 사구려소리를 듣고 사고픈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두말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하고 말하니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울고불고 해서야 끝내 허락을 받고 점심녘에 52원을 주고 병아리 100마리를 사게 됐다.
1993년 4월 1일, 오늘은 가장 힘든 날이였다. 온종일 밀차를 밀었는데 입을 악물고 밀었다. 온몸이 해나른하여 넘어질것만 같았다. 이런 고달픔은 정말 힘겹다.
【기자수기】양춘령은 “본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였다. 초중을 졸업한후 그는 여러가지 돈을 벌 구멍수를 찾았는데 처음에 닭사양을 시작했다. 그러나 기술이 없어 성공은 커녕 빚을 지고 말았다. 1993년부터 2007년까지 그는 선후로 우성시 장집벽돌공장, 평원현윤툰벽돌공장, 동북사장, 평원현종이공장, 천진광주리공장 등 곳에서 일하여 재차 양계장을 꾸릴 자금을 모았다.
“장집벽돌공장에서 7개월 일해서 450원을 벌었습니다. 벽돌을 나르는것은 정말 힘든 일이였습니다. 2007년에는 하루에 120원을 벌수 있었는데 당해의 수입이 4만여원에 달해 양계장을 세울수 있게 되였습니다. 올해 상반기 양계수입은 2만원에 달합니다.” 양춘령은 닭우리 옆에 집 한채를 지었는데 집안의 창문을 마주해 책장이 있었고 책장에는 수십권에 달하는 일기책이 꽂혀있었다. 어떤 책은 종이 여러장을 꿰맨 것이였고 어떤것은 돈을 주고 산 비싼 목책이였다. 1986년부터 지금까지 일기책에 씌여진 글씨들은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성숙되였음을 보아낼수 있었다.
1999: 6000원에 뜨락또를 샀다. 아주 행복했다.
【배경】1996년, 중앙은 농민들의 농기계구입에 대해 경제적부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대량의 농기계가 농가의 뜨락에 나타났고 농촌로동생산능률도 제고되여 농민증수에 훌륭한 조건을 창조했다.
【양춘령일기】1999년 4월 17일, 토요일. 오전 8시에 우성농기계대세계에 갔다. 안에는 차가 아주 많았다. 나는 6000원을 주고 18마력 “신호”패 뜨락또르 한대를 사려고 했다. 판매원에게 값을 물으니 낮아서 5800원이란다. 나는 한대를 골라샀는데 11시도 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사람들은 뜨락또르를 몰고오는 나를 보고 부러워했다. 나는 아주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양묵(양춘령의 아들)이가 더 기뻐했다. 걔는 뜨락또르에 올라서는 내릴념을 안했다.
【기자수기】농업발전에 대해서 말을 꺼내자 양춘령은 흥미진진해서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88년에는 낫으로 밀가을을 했는데 늘 동학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1999년에 도시에서 일해 번 돈으로 뜨락또르를 사면서 수확과 재배가 많이 편리했졌고 2006년에 련합수확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편리해졌다. 6월 10일, 그는 일기에다 이렇게 적었다. “오늘 집에 있었다. 오후에 밀을 가을했는데 수확한 밀을 4번에 나누어 실어들였다. 올해 밀산량은 지난해보다 높아 무당 1000여근이 된다.”
2006: 농업세를 취소한다는 말을 듣고 흥분되여 며칠밤 잠도 잘 못자
【배경】2006년 1월 1일. 농업세조례 페지, 8억 농민들은 농업세를 납부하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농업세조례를 페지한것은 “3농”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력사적 기점에 진입하도록 하였다.
【류종수일기】12월 3일(2006년 1월 2일), 아침식사후, 아이와 함께 집에 있었다. 현에서 소집하는 회의를 텔레비로 시청, 아이가 금후 농업세를 바치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은근히 기뻤다…
【양춘령일기】2006년 1월 1일. 이것은 그야말로 경하해야 일이다. 2000여년 연장되였던 농업세가 페지되였다. 농민의 사상의식가운데 농사를 하는것은 영원히 변할수 없는 도리이이다. 그러나 최근년래 국가에서는 농민들을 각별히 보살펴주고있는데 농업세마저 안낸다고 한다. 백성들은 북을 치고 징을 울리며폭죽을 터치웠는데 거리는 물론 골목골목에서 의기양양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모두의 기꺼워하는 모습은 말할것도 없다.
【기자수기】양춘령은 기자에게 당시 국가에서 농업세를 취소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뻐서 잠도 바로 자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바로 1월 1일 그날밤 몹시 격동된 나머지 이 장편의 일기를 썼다고 토로했다.
2008: 병을 보이고 치료비를 결산받을수 있을줄은 생각못했다
【배경】2003년, 신형농촌합작의료시점이 시작되였다. 농민들이 병보이는 수요가 활성화되면서 작은병은 참고 큰병은 미루어보며 병보이기 바쁘고 의료비가 비싼 문제가 완화되여 농촌의료합작에 참가한 농민들이 갈수록 더큰 혜택을 보게 되였다.
【양춘령일기】2008년 2월 29일. 아버지가 덕주인민병원의 입원결산서를 왕봉루 농촌합작의료판공실에 보낸지 이미 퍼그나 긴 시간이 지났다. 오늘 연근(양춘령의 안해)이가 출근할 때 농촌합작의료증을 갖고 나갔다. 나는 그저 최고로 1500원이나 결산받을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연근이가 돌아와서 2300원을 결산했다고 말했다. 거기에다 현에서 결산한것까지 합하니 3000원을 결산받은셈이였다. 아버지의 입원비용은 5000도 채 안되였는데 내가 생각한것보다 훨씬 적었다.
【기자수기】양춘령은 1997년 5월 20일 부친의 환병때를 회억하면서 감회에 젖었다. 그는 이런 글귀로 그때 당시의 정경을 기록했다. “덕주병원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다. 원래는 1000원의 담보금을 내야 하는데 어머니가 500원을 냈다. 당시 년수입은 5000원도 안되였는데 거액의 의료비는 가정에 심중한 부담을 가져다주었다.” “2005년, 촌에서 매인 매년 10원씩 내고 신형농촌합작의료에 참가하게 했다. 그때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달통되지 않아 두덜대기도 하였다. 정말로 의료비를 결산받을수 있을가고 말이다. 그런데 진짜로 치료비를 결산받을수 있을줄은 몰랐다.” 양춘령은 일기책을 펼치며 웃었다.
2008년: 촌의 곽씨네가 컴퓨터를 사용한다우
【배경】근년래 우리 나라의 농촌문화생활은 갈수록 풍요로와지고 농민군중의 문화권익은 보장이 있게 되였다.
【류종수일기】(1997년)음력 2월 17일, 오전, 우리 집의 두 아이가 채색텔레비 사온후 즉시 장치하였는데 화면이 정말 선명하였다. 거기에다 유선신호까지 첨가되였다. 원래 보던 작은 단색텔레비는 안방의 작은궤우에 옮겨놓았다.
12월 22일(2005년), 늦게 일어남. 눈꽃이 흩날리더니 얼마 안가 지붕이며 마당이며를 하얗게 뒤덮었다. 현에서 열리는 인대회의를 생방송으로 시청하였는데 왕현장이 무료로 영화를 상영한다는 등 8가지 일을 승낙하였는데 마음이 뜨거워났다.
【양춘령일기】1996년 10월 3일. 오늘 영화를 방영했다. 영화관람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 방영한 영화는 《권석통》이였다. 1996년 2월 16일. 노래 몇수를 부르고 시 몇수를 읊었다. 록음기가 있어 “람몽”이란 단락을 록음했는데 아주 자극적이였다. 2003년 2월 11일. 12월달 로임을 발급하였다. 아버지에게 비디오디스크를 사드리기 위해 마음의 정서를 조절하였다.
【기자수기】양춘령의 작은 방안에는 묵향이 꽉 찼다. 문뒤에는 몇자루의 붓이 놓여있고 방바닥에는 붓글씨련습한 선지가 무득히 쌓여있다. 그는 텔레비를 보는외 가장 애호가 깊은것은 서법이라고 말했다. “며칠전 촌의 곽씨네가 컴퓨터를 샀는데 휴식과 심심풀이를 위해 산것이 아니지요. 그것은 온라인접속을 통해 남새시장동향을 료해하고 인터넷으로 무공해남새를 팔기 위한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한대 사야 할것 같습니다… ”양춘령의 말이다.
2008: 농촌 아이들이 모두 도시에 들어가 공부를 한대요
【배경】2008년 10월 9일, 17기 3중전회 소집. 전회에서는 농촌개혁발전기본 목표와 임무를 제기, 도시와 향진 경제사회발전일체화, 도시와 농촌 기본공공봉사균들화 등에 대해 새로운 전망계획 세웠다.
【양춘령일기】2008년 10월 10일. 오늘 외조카가 현성의 외국어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학교의 새로운 사건들을 말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초중을 다닐 때는 자기절로 마른 빵을 싸가지고다녔는데 교통조건이 너무 나빠 흐린 날이면 아예 집으로 돌아올수도 없어 학교에서 배를 곯아야 햐ㅐㅆ다. 지금은 현에서 초중도시진입공정실시에 힘입어 농촌의 아이들도 현성에 가서 공부하면서 일찍부터 도시환경을 익숙히 하고있을 뿐만아니라 학교의 환경이 좋고 교원자질도 높아 아이들은 정말 행복하다…
【기자수기】양춘령은 기자에게 최근년래 국가에서는 점점 더 도시와 농촌의 통일적인 분배와 발전을 중시하고있는데 이왕의 도시를 중시하고 농촌을 경시하던 “도시와 농촌 분리”관념과 작법이 체제개혁과 정책조정을 거쳐 점차 해소되고있다면서 “이제 양계장의 규모가 확대되면 저도 도살장을 설립하여 닭고기를 수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