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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79] 집합적 기억과 타향살이

허연화

2021년 10월 27일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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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챗에서 중국의 1980년—2020년 40년을 회억하는 사진과 글이 나돌고 있어서 흥미롭게 필자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기억과 미디어는 매우 큰 련관이 있다고 한다. 미디어는 정보매체로서 문자, 신문, 잡지, 사진, 영화, 텔레비죤, 뉴미디어 등등이 있다. 회억해보면 필자의 전반 기억은 중국에서의 텔레비죤의 보편화 과정과 밀접히 련관되여있었다.

필자가 태여나서 기억이 있을 때 중국은 이미 개혁개방의 시대에 들어서서 사람들의 삶 또한 하루가 다르게 나날이 향상하던 때였다. 그 하나의 표징이 텔레비죤을 소유하는 것이였던 것같다. 향항드라마 <곽원갑(霍元甲)>이 필자의 어린시절 처음으로 접했던 중국 내지외의 드라마이다. 국유기업단위의 단층주택구역에 살았던 그 때 우리집 주위에는 두집에 텔레비죤이 있었다. 그 당시 집에 텔레비죤이 없었던 필자는 저녁밥을 부랴부랴 먹고는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옆집 문 두드리는 게 일상이였다. 텔레비죤이 보급되면서 동네에서 모여들어서 텔레비죤을 보던 시대가 지났기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였다. 어떨 땐 두 집 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엉엉 우는 동생을 다독이면서 풀이 죽어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여 우리집에서도 ‘홍매표’ 텔레비죤을 소유하게 되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날 그 14인치 텔레비죤이 우리 가족한테 가져다준 흥분과 기쁨은 평생 가셔지지 않을 것같다.
위쳇에서 돌고 있는 중국의 40년을 회억하는 사진과 글을 보노라면 일본류학전인 2000년초까지는 거의 백프로 공감이 된다.

1981년부터 랑평을 대표로 한 중국녀자배구팀이 국제대회에서 5련승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호했던 기억, 배구열풍을 타고 열심히 봤던 일본드라마 <배구녀장>의 녀주인공을 따라 칭쿵피리(晴空霹雳)를 웨치며 놀던 소꿉시절.

1985년, 어른도 아이도 푹 빠지게 만든 향항드라마 <상해탄(上海滩)>, 허문강(许文强)의 멋진 양복차림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빠가 양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신기하던 기억, 그리고 의미도 모르면서 흥얼거렸던 광동어주제가 “로웅빵 로웅롱…”.

텔레비죤에서 봤던 코카콜라를 처음 마셨을 때 상을 찌그리던 남동생의 얼굴,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민첩하게 꼴을 넣는 모습에 탄성을 지르던 동네남자애들, 어린 필자의 눈에도 잘 생겨보이던, 1987년 음력설야회에 모습을 드러낸 비상(费翔)아저씨, 뭐가 뭔지 모르고 봤던 미인들이 많이 나오는 국내드라마 <홍루몽(红楼梦)>, 일본그림영화(애니메이션) <총명한 잇뀨(一休)>, 중국식 록이 뭔지도 모르고 불렀던 최건의 <일무소유(一无所有)>,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보셨던 국내드라마 <갈망>…

아이돌그룹이 뭔지 알려준 대만의 <소호대(小虎队)>의 노래를 친구 몇과 함께 열심히 연습하면서 자기들도 그룹을 만들겠노라 떠들었던 초중시절.

1991년, 쏘련의 해체를 텔레비죤에서 보면서 충격을 먹었던 순간.

집에 전화를 처음 놓았을 때의 신기했던 기분, 과도한 전화사용으로 부모한테 혼나면서도 열심히 친구들과 전화놀이를 했던 중학시절.

장애자인 줄도 모르고 그 노래에 감동받아 처음으로 내 돈을 내고 산 대만가수 정지화(郑智化)의 카세트테프, 그의 감화력 있는 보이스와 노래가사를 들으면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던 학창시절.

향항드라마 <일호황정(壹号皇庭)>을 보면서 변호사의 꿈을 꿨던 한때, ‘4대천왕’ 포스터와 앨범노래로 도배되였던 거리, ‘4대천왕’의 머리스타일과 패션을 보며 멋부리기에 눈 뜨기 시작했던 청춘시절.

PC방이라는 게 생겨나 인생에서 처음으로 메일주소를 만들고 타자를 배우면서 QQ로 멀리 있는 상해의 생면부지의 친구와 짝궁이 되였던 시절.

향항귀환을 환호했던 1997년. 1999년 유고슬라비아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의 충격, 항의시위에서 느낀 젊은 청춘들의 열기.

국내배우가 대만과 향항 배우를 릉가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 드라마 <환주거거(还珠格格)>.

2001년 중국의 올림픽신청성공에 친구들과 함께 환호했던 순간.

세부적인 느낌은 다를 수도 있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중국사람이라면 거의 백프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이다.

이렇게 크고 작은 공동체(집단)가 공유하는 기억을 집합적 기억이라고 한다.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 집단기억이라고도 함)이란 개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가 제창한 것이다. 알박스전까지만 해도 기억은 개인적 차원이거나 심리적인 분야에서만 다루어졌다. 알박스는 기억의 사회적 차원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집단(가족, 종교집단, 민족, 국민 등)에도 기억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이 사회집단을 결속시키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저 이 개념을 주장하였다.

우리 중국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억과 집합적 기억은 거의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화제가 되였던 것들에 의해 형성되였으니 중국에 친근감과 귀속감을 느끼는것이 응당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출국바람이 불면서 필자를 비롯한 일부 중국조선족들의 기억 속에는 중국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없는 한국과의 기억들이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하여 본 한국의 발달된 모습에 놀랐던 기억, 브라운관으로 본 첫 한국드라마 <질투>를 통해 브르죠아적 패션과 삶을 알게 되고, 중국에 있으면서 한국 최초의 아이돌그룹 ‘소방차’의 <하얀바람>의 노래가사 “가슴이 왜 이렇게 뛰는지 나는 잘 몰라요. 얼굴이 빨개지는 리유를 나는 잘 몰라요…”를 흥얼대면서 이성이 뭔지 의식하기 시작했던 청춘시절, 한국드라마 비디오를 대여하는 가게들의 흥성함, 한국가수 김건모의 <핑게>와 향항가수 장학우(张学友)의 <작별의 키스(吻别)>를 좋아해 목놓아불렀던 고중시절의 남자애들. 한국의 아침드라마에 푹 빠진 동네엄마들의 수다, 한국의 녀배우 최진실의 자살뉴스를 듣고 슬픔과 아쉬움을 감치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한국드라마 <응답하라1988>에 공감을 느끼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2000년초에 일본에 류학온 필자는2000년 이후의 기억 속에 중국과 한국외에 일본의 것들이 함께 공존해있다. 2002년 겨울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중국에서 발생했을 때 필자는 일본에서의 류학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국제전화카드가 류학생한테는 비쌌기에 어지간하면 집에 전화하지 않고 있다가 오랜만에 걸린 전화에서 일본의 사스상황을 걱정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알게 된 사스류행소식.

학생신분이면 무료로 최신 카메라기능을 장착한 핸드폰을 소유할 수 있어서 감동 먹었던 일본생활의 스타트. 일본의 야구시합에서 동경 쪽은 교진(巨人)팀, 오사카교토 쪽은 한신(阪神)팀을 응원하는 걸 피부로 느끼면서 어느 순간 한신팀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순간. 중국의 단거리운동선수 류상(刘翔)이 오사카세계육상대회에서 일등하는 중계를 일본어로 들으면서 현장에 가지 않은 걸 후회했던 그 여름.

2008년 중국사천문천대지진 소식을 위챗뉴스에서, 2011년3월11일 동일본대지진 진동을 몸으로 체험하고 쓰나마의 파괴력을 뉴스로 확인하며 자연재해와 인간에 의한 2차재해의 피해성을 침통히 느꼈던 기억.

일본에서의 생활이 길어질수록 필자는 중국 국내의 생활에 대한 생소함이 늘어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 례로 지금 중국에서 류행하는 노래가 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위챗같이 현재의 삶을 전세계적으로 리얼하게 공유할 수 있는 뉴미디어시대에 살고 있기에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앉은 자리에서 중국의 현황을 가상체험할 수 있다. 필자의 일본에서의 체험 또한 위챗을 통해 중국에 있는 지인들과 교류하고 공유함으로써 고향에 있는 지인들한테 필자가 겪은 일본을 가상체험시킬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마침 신종코로나페염시대라는 전지구적인 집합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살고 있는 곳이 서로 다르기에 다지역, 다시점에서의 집합적 기억의 공유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집합적기억으로 봤을때 필자는 분명 1980년~2020년 40년간의 중국, 한국, 일본 이 세곳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귀속감을 갖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다중 귀속감과 필자가 중국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일본에 얼마나 오래 살든지 나는 중국조선족이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