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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72] 세멘트도 따뜻하다

권진홍

2021년 06월 30일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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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온갖 뉴스와 정보도 폭발적으로 범람하는 가운데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으로 2년 째 시달리고 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들을 자꾸 접하려니 머리는 지끈거리고 삐걱거리기만 한다. 그래서 오늘은 좀 가볍고 즐거운 우리의 일상을 한번 돌아보면서 따스함이 밀려오는 장면들을 한번 담고 싶어졌다.

지난 정음글들을 총화하는 자리에서 많은 분들이 각 지역 사람들의 생활세태를 반영하는 글들도 좀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들을 하셨다. 그 때는, 그리고 그후에도 내가 있는 지역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가 많이 다니면서 이야기해보고 들으면서 적어보는 일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워낙 한 곳에 조용하게 앉아있는 것만이 최고의 즐거움인지라 생각은 그냥 생각으로 그쳤다. 가끔 위챗 모멘트에서 어떤 힌트를 받을 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펼쳐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모멘트를 열어보면 제일 먼저 상품광고, 그 다음은 려행사진이나 음식사진들로 도배되여있다. 더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보면 뭔가라도 있으련만 또 그러한 인내심은 갖지 못하고 있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어느 날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굳이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느니 내가 가장 잘 알고 늘 같이 하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써보는 것이 좋지 않을가 하는 것이였다. 옛말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현재 우리 이 시대의 생활과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물론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자주 “사람 사는 건 천층 만층 구만층”이라면서 각각이 다르다는 말씀들도 하셨지만 그래도 둥지이동으로부터 다시 정착에 이르는 시대적 궤적은 대동소이하리라 믿는다.

여느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시골에 살았었다. 두메산골까지는 아니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보다 더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도 꽤 봤으니 말이다.

봄이 시작되면 철에 맞추어 파종하고 밭에 갖가지 채소를 심었으며, 무더운 한여름에는 땡볕에 김을 매고 가을이면 가을걷이를 하고 방아를 찧어 창고를 채우며, 겨울이면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짰었다. 날이 빨리 어두워지는 겨울날에는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방에 앉아있거나 또는 엎드려 책을 읽곤 했는데 그 때는 저녁 7시만 되면 전기가 끊어지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빈 병에 초 한대를 높이 꽂아서 불을 켜고 그 주위에 오구구 모여있었다. 처음엔 서로 초불 가까이로 가려고 했지만 실제 체험으로 등잔 밑이 더 어둡다는 걸 체득한 후부터는 다들 둥그렇게 모여앉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사실 어려서였던지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고 매번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추억들이다.

물론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아리는 장면들이 있다. 모내기철이나 가을철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의 온 몸이 부어있었다. 다리를 꾹 누르면 살이 깊숙이 들어갔고, 얼굴도 눈도 다 퉁퉁 부었다. 몸이 말할 수 없으리만치 괴롭고 피곤하셨을 테지만 늘 묵묵히 일하러 나가셨다. 워낙 많이 보아온 터라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가끔 눈앞으로 스쳐지날 때마다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오빠가 고중에 입학하던 해의 어느 날이였다. 아버지께서는 식사를 하시면서 온 집 식구들에게 중대한 결심을 말씀하셨다. “난 너희들이 공부를 잘하기만 하면 넷 다 끝까지 공부시키기로 결심했다. 내가 우리 집안의 **대 손인데 한 세대를 20여년으로 계산해보면 우리 집안은 600년은 넘게 땅을 파먹고 살았다. 나는 내 아래세대부터는 땅을 뚜지면서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야 하는 농민으로 살지 않게 하련다. 너희들이 공부를 못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잘하기만 하면 학비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줄것이다. 다만 그 뒤의 시집장가까지는 책임질 여력이 없을 것 같구나.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거라.”

그 때는 오빠가 고중 입학, 언니는 초중 입학, 나와 동생은 아직 소학생일 때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도인 우리 집이였기에 겨우 소학생이였지만 그 말씀은 우뢰 만큼이나 크게 다가왔고 아버지께서 꼭 그렇게 해주실 거라고 믿었으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가 머리에 콕 박혔다. 후에 자라면서 그 시절에 농사일만 하면서 두 로동력으로 할머니를 봉양하고 자식들 넷 다 공부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였다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아직 교육에 대해 별로 중시를 하지 않던 시기였고 주위 사람들은 다들 잘 돈 많이 벌겠다고 전국 각지로 김치장사를 나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좀 더 지나서는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온 동네가 한국붐에 몸을 싣느라 들썩들썩할 때였다. 그래서 그 시절 우리 네 자매와 비슷한 또래의 많은 사람들은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초중, 고중을 다녀야 할 나이에 학업이 요절당하였다. 하지만 들떠있는 세상에도, 경제적 곤궁에도 요지부동하셨던 아버지, 어머니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시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시대가 격변기를 거쳐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는 것처럼 우리 가족도 수년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왔던 것 같다. 물론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제각기 큰 장벽에 부딪쳐보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면서 제가끔의 터전이 생겼고 새로운 모임의 장소도 생겼다.

2012년 즈음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평생 동안 땀 흘리고 정을 쏟은 고향 생활을 정리하고 아들이 있는 심천으로 가셨다. 첫 1, 2년은 생소한 생활방식에 적응하시느라, 그리고 고향에서처럼 집문만 나서면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말벗이 없어서 좀 힘드셨지만 이젠 심천이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신다. 젊은 사람들도 대도시로 이동한 후 가장 이야기 많이 하는 것이 고향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따끈따끈한 구들에 모여앉아 뜨끈뜨끈한 국물을 후루룩후루룩 마시면서 즐겁게 지내던 그 분위기가 그립다고들 한다. 아마도 시골이 그립다고 하는 데는 고향 자체보다는 그만큼 사람냄새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로인들은 더더구나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께서 굳이 고향타령을 하지 않으심은 새 둥지가 진정 마음의 안식처로 자리잡혔기 때문이리라. 생활현장이 바뀌였을 뿐 그 분위기는 고향에서 현대 도시로 그대로 옮겨왔다. ‘Ctrl + X → Ctrl + V’인 셈이다. 아니 그냥 복제, 붙여넣기가 아니라 업그레이드된 복제, 붙여넣기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 시설들의 편리함과 생체리듬에 더 적합한 기후가 가미되였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심천에 계시니 이젠 모임의 장소가 자연 심천으로 되였다. 설명절 때마다 가능한 한 다 모여서 같이 설을 쇤다. 고향에 있을 때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차례도 지내는데 차례 음식은 옛날보다는 간편하게 한다. 워낙 오래 유지해오던 전통이라 개구쟁이 조카들도 추석이나 설날 차례 지낼 때 만큼은 일찍 일어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나와서 식을 갖춘다. 어릴 때 차례 전날 아버지께서 늘 지방을 쓰시던 기억 한조각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은 절차를 많이 간소화하셨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아주 젊은 시절부터 모셔오던 조상님을 모시는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번마다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내 죽을 때까지만 모시고 우리가 죽으면 니들은 하지 마라…”

그래서일가… 손자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존경심, 효심이 자별하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을 흠뻑 먹고 자란 큰 조카는 언제 어디에서나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를 챙긴다.(우리가 자랄 때는 가장의 무게에 지지리 눌려 엄한 모습만 보이셨던 아버지께서 손자에게 만큼은 오직 할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그대로 쏟으셨던 것이다.) 지난 해 년말에도 설 같이 쇠려고 우린 다 같이 모였었다. 모일 때마다 가족끼리 한잔씩 하는 게 상례였는데 고중생이 된 큰 조카놈도 가끔 맥주 한잔으로 어른들한테 끼이군 한다. 그 날도 고기구이에 한잔 기울이면서 즐거운 시간들 만긱하고 있는데 조카놈이 맥주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어른들 뺨칠 말을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장수하십시오.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물론 중국어로)”. 너무도 진심에서 우러러나오는 말이었는데 언제 애가 저런 속깊은 생각을 했을가 다들 눈이 둥그래질 정도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당연히 좋아서 입도 못 다무셨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께서 한 수 뜨신다.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늙은이들 잔소리만 하는데 뭐가 좋겠노…” 하시면서. 그랬더니 조카가 하는 말: “아니예요. 진심이예요.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아들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면서 4대가 같이 살기를 바란다고 한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단다. 아직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언제 저런 철이 났지 하면서 절로 엄지가 척 나갔다. 옆에서 듣는 내가 가슴이 뭉클해왔으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더 말해 뭐하랴. 그 날 손자의 진심 어린 말에 아버지는 몸이 좀 편찮으셔서 한동안 안 마시던 술을 몇잔 더 하셨다. 기분 좋게 마신 그 술은 아마도 해롭지 않고 오히려 보약이 되였으리라…. 그 날은 조카도 살짝 과음했는지 집에 들어서면서 “할머니, 술 마이~ 마셨어요.”를 연거푸 반복했다. 이 말은 우리말로 했다. 천천히 이야기하면 꽤 알아듣고 말도 조금씩 할 수 있고 글자도 좀 읽는다. 발음은 정확한데 어딘가 좀 어눌한 어조였다. 그런데 내 조카여서인지 그 어눌함마저도 우리의 유쾌함을 극대화시켜주는 것 같았다.

발달한 교통수단 덕분에 우린 이렇게 꽤 자주 모인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 명절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족이란 건 참으로 이상하다. 그리고 우린 다 건망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모일 때마다 한잔 하면서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지나고 보면 거의 매번 같은 말들을 반복할 때가 많다. 그런데도 번마다 지루하지 않고 즐겁기만 하다. 술이 한순배 돌아가면 시작하는 말들이 대개는 “우리 옛날에 어릴 때 서로 강냉이 한자루 더 먹으려고 끌떡끌떡했는데…”, “오빠 형님 결혼식 때 눈은 왜 그리도 많이 내려서…”, 그 다음은 또 조카놈 이야기를 하면서 “얘는 어릴 때 침은 얼마나 질질 흘리던지…” 대개 이러루한 이야기들로 시작하면 그 뒤로는 이야기고가 터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그러다가 주체할 수 없는 흥이 터지면 남비가 조난당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흐뭇하게 들으시다가 “아이고~~ 늙은이들은 눈치 있게 빠져줘야 젊은 사람들이 편하게 마시지~~~” 하시면서 산책을 나가시고 어머니는 옆에서 이야기를 거들기도 하고 또 “아이고, 얘들아, 술은 좀 그만들 마셔, 몸 다 상한다…” 하시면서 우리들의 건강 념려도 하신다.

우리는 현대 도시에서, 첨단과학기술과 경제발전속도를 세계적으로 과시하는 여기에서 가끔 또는 종종 현대인들을 억압하는 수자와 속도를 뒤로한 채 구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마음껏 웃는다. 그리고 때로는 외로이 혼자 명절을 보내야 하는 지인이 있으면 단기 가족이 되여 같이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젠 도시는 시골 만큼 인정미가 없다는 말도 썩 와닿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이 지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수시로 한자리에 모이고 부빌 수 있는 것은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분명한 구심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향에 있을 때는 가문의 장자이신 아버지를 중심으로 작은할아버지댁, 고모할머니댁 그리고 우리 삼촌, 고모 등 가족들이 자주 모여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현대 도시로 이주한 지금은 또 장자인 오빠가 바통을 이어받아 우리 네 자매가 모이고 사촌 형제들이 모이고, 진짜로 사돈에 팔촌까지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도 가끔 함께 가족이 되여 지낸다. 하나의 구심점에 원심력과 이심력이 적절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구수한 흙냄새가 없는 세멘트로 둘러싸인 도심에서도 사람냄새는 여전히 전달이 되고 우리는 조카가 얘기한 것처럼 고향에서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사세동당(四世同堂)》을 감히 꿈꾸어본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은 고향에서 느꼈던 사람냄새, 가족적인 분위기가 그리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동초기여서 아직 새로운 곳에서의 가족적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아서가 아닐가 싶다. 원래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보금자리를 튼 모든 사람들이 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며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김홍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