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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칼럼

[정음문화칼럼171] 주문빈렬사를 기리며

리성일(중국사회과학원) 

2021년 06월 17일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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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5월 30일,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명예리사장: 강경산 중국공정원 원사, 리사장: 박걸 커시안그룹 리사장)는 리란 사무총장의 인솔하에 주문빈(周文彬, 1908-1944년) 렬사의 모교인 북경시 통주구 로하중학교(潞河中學)와 통주지역 제1당지부 기념비를 참관하였다. 이 날 행사에는 애심후원인사와 조선족대학생들, 그리고 인민넷 조문판,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 《중국민족》잡지사, 《료녕신문》 기자 등 도합 30여명이 참가하였다.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는 2017년부터 수도 북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족대학생들을 조직하여 통주 로하중학교 참관을 통한 애국주의혁명전통교육을 진행해왔다. 이번 행사에도 주문빈렬사의 동상과 학교내에 세워진 혁명렬사비, 애국주의혁명전통교육전시관 등을 방문하였으며 주문빈렬사장학금에 성금 1만원을 기증하였다.

주문빈렬사에 대해서는 지난 세기80년대부터 《주문빈》(《청년생활》, 1984년 제1기), 《중공당사 인물전(제22집)》(섬서인민출판사, 1985년), 《중공통현 제1당지부 서기 주문빈동지》(耿寶珍, 1985년), 《주문빈》(리선우 등 저, 료녕민족출판사, 1988년),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3) 봉화》(민족출판사, 1989년) , 《불멸의 발자취》(김성룡 저, 민족출판사, 2005년), 《최룡수문집》(민족출판사, 2010년), 《중공당사 소수민족인물전》(민족출판사, 2012년) 등 잡지와 도서들에서 많이 소개되였다. 기실 1950년대에 당산기동렬사릉원, 화북군구렬사릉원(석가장), 양가포렬사릉원, 반산(盤山)렬사릉원 등 지역에 주문빈렬사의 묘비와 동상이 만들어졌으며 지난 세기 60년대에는 《당산로동보》(唐山勞動報), 《하북성기동렬사릉원 렬사자료권》(당산시당안관 소장) 에서도 주문빈렬사의 사적을 수집, 정리하였다.

특히 연구론문으로는 손염홍(孫艶紅, 현 한국 건국대학 교수)의 《周文彬과 중국혁명》(《한국학론총》, 2008년), 동순벽(董順擘, 현재 천진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근무)의 《기동지구 조선민족 항일영웅 주문빈》(연변대학 력사학부 2009년 석사학위 론문, 지도교수: 김성호 교수)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창건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지금까지 연구성과와 소개를 바탕으로 주문빈렬사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1) 주문빈 렬사는 통주지역 첫 당조직을 창설하고 지부서기를 담당하였으며, 우리 당의 통주지역 발전을 위해 커다란 력사적 공헌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주문빈렬사는 1908년 9월 23일, 조선 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에서 부친 김기창, 모친 홍기주의 슬하에서 태여났다. 그에게는 큰 누나 김신경, 맏형 김승호, 둘째형 김영호, 남동생 김상호와 녀동생 김신정이 있었다고 한다. 1912년에 부친 김기창선생이 ‘105 사건’ 혐의를 받아 거문도에 1년 동안 류배되였으며, 그후에 하는 수 없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상해, 천진을 거쳐 1914년(일부 기록에는 1915년)에 하북성 통현 복흥장(현재 북경시 통주구)에 가족을 데리고 이사해왔다.

주문빈렬사의 본명은 김성호(金成鎬)이며, 1928년 8월 북경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하게 되면서부터 본인의 이름을 주문빈(周文彬)이라고 고쳤다. 후에 주언, 조화남(趙華南, 개란탄광 동맹대파업 투쟁시기) 등 이름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주로 그가 종사하였던 지하공작과 밀접하게 련관된다고 할 수 있다.

1921년에 주문빈렬사는 로하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로하중학교의 력사교원이였던 경보진(耿寶珍)선생의 회억에 의하면 1921년-1928년 사이에 로하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학생들이 40여명 넘었다고 한다. 주문빈외에도 김영호, 조영, 량명, 김찬(김문철) 등 혁명가들이 있었다. 통현 조선학생들은 로하중학에서 ‘통주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은 조영, 총무는 김영호가 맡았다.

로하중학교(1867년 개교)의 기록을 보면 주문빈의 둘째형 김영호는 중국 국가체육선수로 선발된 유명한 륙상선수였다. 그는1923년에 일본 오사까에서 열린 제6차 원동운동회와 192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원동체육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륙상 10종경기에서 제4위를 하였다. 1925년 7월, 중학교를 졸업한 김영호는 광주에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28년에 쏘련에 가게 되였다.

1919년 일어난 5.4운동은 중국현대사의 새 페지를 열었으며 그 영향은 통현에까지 파급되였다. 1920년, 등중하(鄧中夏)에 의해 조직된 ‘북경대학 평민교육강연단’ 통현강연조가 통현에 와서 10월혁명을 선전하였다. 이 시기 둘째형인 김영호가 사회주의혁명에 먼저 참가하였으며, 1926년 3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김영호의 활동은 동생인 김성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6년 7월에 주문빈은 김영호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영광스럽게 가입하였다. 그 해 가을, 그는 로하중학교내에 ‘사회주의과학 학습소조’를 조직하고 당원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1927년 가을, 주문빈은 장진(張珍, 일명 張學淵), 강경신(康景新), 장수체(張樹棣), 홍경륭(洪慶隆), 김상호(金祥鎬, 주문빈 남동생) 등 다섯명을 비밀리에 당원으로 발전시키고 ‘중국공산당 로하중학지부’를 설립하였으며 그가 지부서기를 맡았다. 이 때는 제1차 국공합작이 국민당반동파에 의해 파괴되고 국내혁명이 저조기에 들어섰지만, 주문빈은 혁명에 대한 신심을 잃지 않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당조직을 발전시켜나갔다. 동생 김상호는 연경대학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지하당활동에 참가하였다.

(2) 주문빈렬사는 1938년 개란탄광로동자 대파업투쟁을 령도하여 승리로 이끈 로동운동의 주요 지도자였다.

1928년에 로하중학교를 졸업한 후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 연경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는 혁명의 수요로 인해 북경에서 직업혁명가로서 지하공작을 하게 되였다. 만일 그가 대학에 진학하였더라면 그의 후날의 인생은 전혀 다른 모습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추호의 동요도 없이 혁명의 길을 견지하였다.

이 시기 그는 후에 중공하북성위와 중공천진시위 서기를 담당하였던 리철부(李鐵夫, 조선이름은 한위건)의 령도와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30년에 주문빈은 북방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동북 무순탄광에 가서 로동자운동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인1933년에 김기창 부부는 큰 아들 승호와 둘째 아들 영호를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1935년, ‘화북사변’으로 화북지대의 대부분 지역이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남동생인 김상호와 김신정도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주문빈만 중국에 남아 천진, 북경 등 일대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1936년에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북방국 사업을 지도하였으며 하북성당위원회는 주문빈을 당산에 파견하여 당산공위(工委) 서기로 임명하였으며 그 지역의 로동자운동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개란탄광에서 전기수리공으로 있으면서 당의 선전, 조직 사업을 맡았으며 조화남이라는 가명으로 혁명활동을 진행하였다.

1938년 3월, 주문빈의 세련된 령도하에 3만여명 개란탄광 로동자들이 참가한 동맹 대파업이 성세호대하게 일어났으며 한달 동안의 치열한 투쟁을 거쳐 파업은 승리를 거두었다. 후에 파업을 계기로 7000여명 탄광로동자들을 조직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며 기동항일련군을 조직하였다. 이 때 주문빈은 기동항일련군 1지대 정치부 주임과 군정위원회 위원 등 중요한 직무를 맡았다. 개란탄광로동자들의 대파업은 세계를 놀래운 대사건이였으며, 중국공산당의 로동운동사에서 성공적으로 진행한 모범적 투쟁사례였다. 당시 국민당통치구역(白區) 당조직을 책임졌던 류소기는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폭동을 찬양하여 “우리 당이 계획적이고 령도 있게 조직한 한차례의 훌륭한 폭동”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여기에 주문빈렬사의 큰 기여가 있음은 의심할 바 없다.

(3) 주문빈렬사는 기동지역 항일투쟁의 주요 지도자, 당의 우수한 간부와 탁월한 국제주의전사였다.

1939년 1월, 기열변특위(冀熱邊特委)를 기동지위(冀東地委)로 개편하고 주문빈이 서기를 담당하였다. 그 해 7월, 기동지위를 기열찰구당위 기동구당분위(冀熱察區當委 冀東區黨分委)로 개편하고 리초리(李楚離)가 서기, 주문빈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란현(滦縣), 락정(樂亭) 등 지역에서 항일총대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침략군의 ‘3광정책’으로 인해 기동지역 항일정세는 준엄하였지만, 항일근거지를 계획적으로 확대하고 군수공업기지도 세워 슈류탄, 지뢰, 폭파통 등 무기를 자체로 생산하였다.

1942년, 기동지위(冀東地委)를 설립하고 리운창(李運昌), 리초리, 주문빈 등 5인으로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리초리가 서기를 맡고 주문빈이 기동지위의 일상사업을 지휘하게 되였다. 1943년 7월, 형세 수요에 근거하여 기동지위를 기열변특위(冀熱邊特委)로 개편하고 리운창이 서기, 리초리가 부서기, 주문빈이 특위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항일무장대오를 확대해나갔다.

1944년 1월 기열변특위는 도시공작부를 설립하였으며, 로동자총대를 세워 국민당통치구역 도시사업을 강화하였다. 이 해 10월 17일, 특위 기관이 하북성 풍윤현(豊潤縣) 양가포(楊家鋪)에서 5000여명의 적들의 포위공격을 받았는데 치렬한 전투에서 주문빈은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6살 밖에 되지 않았다. 주문빈렬사의 전우인 리운창(원 사법부 제1부부장)은 “주문빈동지는 탁월한 국제주의전사이며, 기동지역 당조직의 주요 령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당의 우수한 간부”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문빈렬사가 희생된 후 당지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시신을 마두산(馬頭山) 아래에 매장하였다. 전국이 해방된 후 인민정부는 당산시렬사릉원에 그의 묘지를 옮기고 렬사의 흉상을 만들었으며, 경동반산(京東盤山) 렬사릉원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 후에 석가장에 화북군구 렬사릉원이 세워진 후, 이곳에 그의 유골을 옮기고 묘지와 묘비를 만들었으며 국제주의전사 주문빈의 동상을 세웠다. 당산 기동렬사릉원에서는 아직도 주문빈의 릉묘를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무정장군은 조선에 가서 평안북도 책임자를 찾아 주문빈의 유가족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이 때에야 그의 가족들도 그가 이미 희생된 것을 알게 되였다. 1950년 조선전쟁이 폭발한 후, 김신정은 어머니 홍기주녀사를 모시고 중국에 와 오빠 주문빈이 피흘려 싸우던 기동지방을 돌아보았으며 북경시 부시장 류인(劉仁, 주문빈렬사의 전우)의 만류로 북경에 남아 생활하게 되였다. 리광인선생에 의하면 1958년 청명절에 주문빈렬사의 어머니 홍기주녀사와 녀동생 김신정이 기동렬사릉원을 찾았었다고 한다(<주문빈과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길림신문》, 2017년 5월 9일).

주문빈렬사의 어머니 홍기주녀사는 북경에서 만년을 보냈고 녀동생 김신정 녀사는 북경아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였으며,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미 작고한 중앙당학교의 최룡수 교수의 기록에 의하면, 1960년대초 북경아동병원 부근에서 홍기주녀사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정률성 어머니를 우연하게 만나서 알게 되였고 그후에 두 분은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위대한 두 혁명가의 어머니의 만남은 매우 감격적이였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사진 한장 남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최룡수, <혁명가의 보금자리>, 《민족단결》, 2000년 1월).

1984년에 주문빈의 전우였던 장진(張珍. 원 제5기계공업부 부장, 전 화학공업부 부부장)은 학교창설 경축대회에서 주문빈사적을 이야기하고 ‘문화대혁명’ 기간 받지 못하였던 로임을 전부 헌납하여 ‘주문빈렬사장학금’을 설립하였다. 이 해에 로하중학교는 주문빈렬사를 기념하여 학교내에 주문빈렬사동상을 세우고 ‘주문빈학급’을 설치하였다. 후에 초중부 교원들을 중심으로 ‘주문빈당지부’를 내왔으며, 학교내의 주간도로를 ‘문빈로’(文彬路)라고 명명하였다. 2008년에 주문빈렬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주문빈렬사》 책자를 발간하였다.

2014년에 국가에서 렬사기념일을 정한 후, 매년 9월 30일 중공통주구위원회와 통주구 인민정부는 대운하삼림공원내의 주문빈렬사 조각상이 모셔져있는 ‘제1당지부’ 기념비 앞에서 렬사기념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8월, 주문빈렬사는 민정부가 공포한 항일전쟁에서 완강하게 투쟁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600명 저명한 항일 영웅명단에 포함되였다. 2017년 7월, 중앙텔레비죤(CCTV)은 통주지역 첫 당지부를 소개할 때 “로하중학교는 통주지역 첫 당지부가 설립된 혁명의 요람이고, 경진기(京津冀) 홍색문화의 중요한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외에 하북성 당산시 로북구(路北區) 한성진(韓城鎭) 중문장(中文庄)소학교에서는 주문빈렬사가 희생된 10월이 되면 학교내의 ‘주문민광장’에서 ‘주문빈영웅소선대대’ 기념활동을 벌리고 있다.

주문빈렬사에 대해서는 조선과 한국에서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신규식, 박영, 양림, 한위건, 장지락, 김성호, 정률성, 한락연 등 수천수만의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청년들이 중국혁명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룡수 교수 등의 노력으로 중한 수교 이후에 주문빈렬사는 한국사회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강만길, 성대경 엮음, 창작과 비평사, 1996년). 2005년에 김신정녀사는 한국 로무현 대통령이 주문빈렬사에게 발급한 대통령표창상을 수여받았다.

2021년 5월, 습근평 총서기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구시(求是)》에서 “홍색자원으로 홍색유전을 잘 전승시켜 홍색강산을 세세대대 전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력사에 대한 망각은 자신의 뿌리를 베여버리는 것과 같다. 세월이 갈수록 주문빈렬사와 같은 혁명선렬들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발굴하고 기록하는 작업이 매우 절박해지고 있다.

최근 《주덕해평전》, 《정률성평전》, 《윤세주(석정)평전》, 《조남기전》, 《리재덕회고록》, 《리민회고록》 등 우리 민족의 명인들이나 혁명선렬들에 대한 평전, 인물전기, 회고록 등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선렬들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당창건 100주년을 계기로 ‘한락연평전’, ‘주문빈평전’ 등과 같은 우리 혁명선렬들에 대한 기록물이 더 많이 출판되여 그들의 생애와 혁명업적이 널리 알려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는 바이다.

래원: 인민넷-조문판(편집: 임영화)